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 KBS1 라디오 진행자
1933년 대통령에 취임한 지 닷새째 되던 날.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최고재판소의 대법관직을 은퇴한 미국의 대표 원로 격인 웬델 홈스 판사를 전격 방문했다. 그 날은 홈스 판사의 아흔 두번째 생일이었다. 둘은 한 시간여에 걸쳐 미국사의 많은 고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홈스 판사는 루스벨트가 자리를 뜬 후, 그에 대한 촌철살인의 인물평을 남겼다. “정신은 이류야, 그렇지만 감각은 일류군.”
루스벨트와 함께 성공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레이건에 대한 평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닉슨 시절부터 빌 클린턴까지 4명의 대통령을 모셨던 데이비드 거겐은 ‘레이건 대통령은 루스벨트 대통령처럼 이류의 정신과 일류의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그 두 가지를 결합시킴으로써 대통령으로써 남다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David Gergen, , 2002).
그렇다면 홈스나 거겐이 얘기하는 일류의 감각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대다수의 국민과 교류하고 연대할 수 있는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들로 하여금 필요할 때 사랑 혹은 분노의 감정을 고취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높은 감성지수(EQ)와 연설·대화 능력이 전제돼야 한다.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레이건 대통령은 이런 능력을 통해 위대한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의사소통가)로 거듭 날 수 있었다. 외교적 유연함과 사생활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이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 역시 이런 감각 덕분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 정부의 핵심 인사들에게서 보는 것은 정반대다. 일류의 정신과 이류의 감각이다. 사실 노 대통령과 참여 정부가 던지는 국가적 의제(agenda) 가운데 터무니없는 것은 거의 없다. 속도와 전달 방식이 문제이지, 필요성과 방향에서 문제를 삼기는 어려울 정도다. 지역주의 청산이나 양극화 해소, 개방을 통한 경쟁 전략은 모두 현 단계의 우리 사회에서 절실한 정책들이다. 일부 언론과 여론 주도층의 주장과 달리, 여기에 정치적 사심이 게재돼 있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문제는 이 의제를 국민들에게 전하는 방식과 이를 실천하는 속도에 있다. 이들은 백년대계의 거창하고 추상적인 미래 담론을 거칠게 만들어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이 장기 비전을 임기 내에 끝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몰아 부친다. 가끔씩 대통령은 5년 단임제라는 것을 잊은 듯 말하고 행동한다. 그리고는 이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은 대역 죄인 취급도 불사한다. 이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등을 돌렸다. 참여 정부가 제시한 개혁 의제에 동의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국민과 교류하고 연대하지 않으려 드는 태도 때문에 그랬다.
이번 부분 개각에서 논란이 되고 지난 지방선거 여권 참패의 한 요인이 된 ‘세금 폭탄’이 좋은 예다. 물론 김병준 교육부총리 내정자는 이 말을 야당의 공격을 한 마디로 정리해 전달하는 과정에서 나온 용어라고 해명하긴 했다. 더욱이 우리 국민들 역시 이 말에 부동산 투기나 부동산 부자들에게 타격을 주겠다는 선한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여권이 이 용어를 빈번히 쓰기 시작하면서, 국민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정책을 펴면서 고소해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됐다. 한 마디로 ‘그토록 옳은 얘기를 왜 이토록 싸가지 없이 하는지’ 우리 국민들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참여 정부의 거의 모든 핵심 인사들이 이런 식이었다. 선의(善意)와 명분만 있으면 됐지, 국민들에게 어떻게 받아 들여 질까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것이 오늘날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국민간의 의사소통 단절을 초래했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시작된 국민과의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 가운데는 ‘보통 미국인’(Ordinary American)이라는 것이 있다. 특별한 계기에 보통의 미국 사람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그와 대화하면서 정책 현안들을 국민들에게 설득하는 방식이었다. 우리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커뮤니케이터로 꼽히는 고 박정희 대통령 역시, 언제고 훌쩍 지프차를 타고 국민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출신과 성장, 그리고 대통령 당선 배경에서 가장 보통 사람에 가까운 노 대통령이, 정작 그들로부터 가장 멀어져 버린 것은 사실 일류 정신보다는 이류 감각 때문일 것이다.
김방희(생활경제연구소장·KBS 1라디오 <김방희·지승현의 시사플러스>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