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룡/언론인

 언젠가 모 미군 장성이 한국사람을 일컬어 레밍(lemming)의 습성이 있다고 한 적이 있다. 레밍은 북유럽에 무리지어 사는 일명 「나그네 쥐」. 3~4년을 주기로 집단 대이동하는 과정에서 직진을 고집하기 때문에 호수나 바다와 마주치면 끝내 전원 빠져 죽기마련인 별난 동물이다.

 우리로서는 「쥐새끼」에다 견준 비유가 몹시 불쾌하기는 하나 차제에 이와 관련된 「하멜른의 풍각쟁이」를 더불어 예거해 속뜻을 찾고자 한다.

 하멜른은 독일 베러강(江)변에 소재한 도시인 바 1284년 이곳에서 130명에 달하는 소년들이 행방불명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왔고 지금도 6월이면 이를 소재로한 촌극이 무대에 오른다고 한다.

 그 옛날 이 고을에 쥐떼가 극성스러워 애를 태우던 참에 낯선 풍각쟁이가 찾아와 보수를 주면 쥐떼를 제거하겠다고 나섰다. 이윽고 풍각쟁이가 이상한 가락을 피리에 담아 울리자 신통하게도 쥐떼는 무리지어 베러강에 모두 빠져 죽고 만다.

 그러나 수장이 애초의 약속을 깨고 사례금을 주려고 하지 않자 그는 고을 소년들을 유인해 깊은 동굴속에 가두고 말았다는 섬쩍지근한 이야기다.

 일찍이 그림의 동화(童話), R 브라우닝의 시에도 인용된 바 있는 소년 집단 실종사건에 대해 후세 사람들은 이것이 전설이 아닌 당시 「소년십자군」 파견에 얽힌 비극적 결말을 다룬 실화라는 견해가 없지 않다.

 각설하고 레밍(나그네 쥐)과 「하멜른의 풍각쟁이」를 통해 제기되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리더를 잘못 만났을 때에 나서는 집단히스테리요, 그릇된 군중 심리가 몰고 올 파탄을 은유한 것이라고 가정할 때 유감스럽게도 서두의 비아냥은 경청의 값어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일러서 레밍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감지할 수 있는 일사불란한 텔레파시가 작용했을 것이며 「하멜른의 풍각쟁이」는 바로 레밍의 습성을 역이용한 계략이라는 풀이도 가능하다.

 따라서 리더의 획일적 독선과 근거없는 선동에 주견없이 맹종하는 군중심리가 얼마나 비생산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는 길게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언뜻 생각하기에도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원대한 밑그림과는 달리 오로지 입시교육을 지상으로 샛길을 치닫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아파트 청약붐은 「떴다방」이라는 풍각쟁이에 의해 조성된 측면이 없지 않으며 한편으로는 증권가 또한 난리인데 여기에는 토를 붙여야 할 것 같다.

 최근 증시 과열현상을 은근히 염려한 재경장관이 『투자는 자기 책임하에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 말 한마디가 평소 「정부에 대항하지 말라」는 증시의 격언과 맞물려 주가는 금시에 곤두박질했다.

 그러자 장관은 침이 마르기도 전에 현 증시의 장세가 『거품이라고 볼 수 없다』는 말로 바꾸어 하루만에 다시 40포인트가 용솟음쳤다.

 이 기회를 놓칠까 보냐고 농민들이 논밭을 떠나 주식시장에 몰리는가하면 심지어 학생들까지 빚내어 떼돈 벌고자 덤비는 판국이다. 장관 말 한마디에 우왕좌왕하는 오늘의 세태에서 하멜른의 피리소리에 놀아나는 레밍(나그네쥐)을 연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일찍이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운 한명회는 『예부터 俗은 勢를 따른다』고 우민정책(愚民政策)을 두둔했다지만 오늘날 국민을 속물시하는 권력은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점 6ㆍ3재선을 앞두고 여야가 정치이념 구현과는 거리가 먼 흠집내기에 경황없는 것은 아직도 국민을 우습게 보는 구태의연한 작태이다.

 어떤 경우에도 따르는 자에 앞서 따르게 하는 위치에 선 자가 먼저 올바른 방향감각과 통찰력(洞察力)을 갖추어야 참 지도자로 추앙받는다.

 사람사는 곳엔 어떤 형태든 「하멜른의 풍각쟁이」는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가 「쥐」를 없애는 소용스러운 존재냐, 아니면 「사람」을 잡는 위험한 풍각쟁이냐를 가려내는 슬기는 매사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함이 없이 대처할 주관인즉 이것은 다름아닌 국민의 양식(良識)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떠돌이 쥐의 습성을 닮았다고 지적했을까. 거듭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