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인천대총장

 필자는 지난 3월27일부터 30일까지 3박4일에 걸쳐 금강산을 관광했다. 한국언론재단이 신문ㆍ방송ㆍ통신사 통일문제 담당 논설위원 약 30명에게 금강산을 관광시키는 가운데 북한에 관한 세미나를 금강산으로 가는 관광선 「금강호」에서 열면서 필자에게 특강을 맡겼기에 그 기회를 이용했던 것이다.

 3박4일의 금강산 관광이라고 하면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 금강산의 이모저모를 꽤 많이 보았으리라고 지레 짐작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사흘밤을 모두 배안에서 잤고 금강산 관광은 이틀에 한정됐다. 금강산을 제대로 보려면 스물두 코스를 모두 밟아야 한다고 하는데 현재 남한 사람들에게는 구룡폭포를 보는 코스와 만물상을 보는 코스 두 코스만 허용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한 코스당 걸어서 서너 시간에 한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글자 그대로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하겠다. 이 지극히 제한된 여행을 통해 어찌 『금강산이 이러저러하다』고 평할 수 있으랴. 하물며 『북한이 이러저러하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혹시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보람이겠다 싶어 필자의 경험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 「금강호」가 우리 일행을 내려놓은 장전항의 앞바다는 참으로 맑고 깨끗했다. 군항의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으며 푸른물과 삽상한 공기에 무척 끌려들었다.

 둘째, 장전항으로부터 곧바로 이어지는 금강산 일대도 대단히 깨끗했다. 종이 한 조각 담배꽁초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자연을 잘 보전했구나』하고 감탄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관광할 형편이 전혀 되지 못하는 까닭에 자연이 잘 보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일행은 이틀 동안 북한 관광객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셋째, 그러나 기암절벽에까지 김일성을 찬양하는 문구를 새겨 놓은 것을 보게 되면 자연 파괴의 한 모습을 확인하게 됐다.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많이 파놓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음각된 글자의 높이가 2m에 깊이가 1m나 된다고 한다.

 넷째, 배에서 내려 입항 절차를 밟고나서 현대관광이 준비해 놓은 버스를 타고 약 한시간 정도 가서 걷기 시작하는데, 버스 길 좌우 양편으로 철조망이 쳐 있었다. 『철조망대신에 나무를 심었더라면』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섯째, 철조망 저 편으로 온정리 마을이 보였다. 마을 전체가 한산했다. 이틀 동안 우리는 그 마을을 낀 도로에서 자동차를 한대도 보지 못했다. 소달구지가 고작이었고 어쩌다 자전거를 볼 수 있었다.

 여섯째, 금강산에는 관광 시설, 예컨대 케이블 카 또는 위락시설 같은 것이 젼혀 없었다. 그래서 마냥 걸어야 했고, 따라서 관광이라기보다 등산에 가까웠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는 서양사람들은 매력을 느끼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일곱째, 모든 것이 경직되어 있었다. 우리는 관광이라고 할까 등산이라고 할까를 마치고 오후 세 시에 장전항으로 돌아왔는데 배에 태워주지를 않았다. 다섯 시 반에 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두 시간 반을 효과적으로 보낼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무료하게 잡담을 나누어야 했다.

 여덟째, 금강산 관광 길에는 이른바 지도원들이 서 있었다. 특히 김일성 어록비 또는 김일성 사적비가 서 있는 곳, 그리고 김일성에 관한 글이 새겨져 있는 바위에는 반드시 2명이 1조가 되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들을 신성하게 다뤄, 남쪽의 관광객이 그것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해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홉째, 지도원들의 나이는 대체로 열 여섯살에서 스물 두살사이였다. 한창 얼굴이 필 나이들이다. 그러나 거의 예외 없이 피지를 못했다. 영양실조의 모습이 완연했으며 지쳐 있기까지 했다. 옷은 남루했고 운동화는 50년대 초의 우리 것에 비슷했다. 애처롭다고 할까, 가엽다고 할까 무척 안쓰러웠다.

 열째, 지도원들은 모두 평양에서 뽑혔고 거기서 교육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상무장이 철저히 잘 되어 있었다. 『우리 공화국이 지금은 어렵지만 지도자를 잘 만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반부는 IMF때문에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남반부는 희망이 없다니 걱정입니다』라는 말을 되뇌이는데, 그것은 기계적인 선전이 아니라 내면화된 믿음으로부터의 소리처럼 들렸다.

 한 상급 지도원은 필자를 보더니 『인천대학교 총장 선생님이시지요? 잘 모시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돌아가시면 우리 공화국에 대해 말씀 잘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북한이 굶주리고 있다는 얘기, 북한이 망해가고 있다는 얘기 같은 것은 모처럼 조성된 남북화합의 분위기를 깨뜨리게 되므로 삼가 달라는 주문이었다. 북쪽 동포들이 건강하게 잘 살게 되기를 바란다고 화답하면서도 마음은 우울했다. 너무나 어렵게 살며 지쳐 있으면서도 그저 「수령님」을 떠받들기만 하는 그들의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희망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