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행주치마라는 것이 있었다. 아낙들이 부엌일 할 때 입는 치마였다. 치마보다는 작되 부엌일에 더럽힐까봐 치마 겉에 덧입어 물묻은 손을 씻기도 했다. 복식이 서양화해서 이제 행주치마를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우리는 그 유래를 잘 알고 있으면서 크게 자랑한다. 행주치마의 내력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산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우리의 어머니들에게서 비롯된다.

 왜군들이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는 우리 군사들을 일격에 섬멸하려고 3만의 대군으로 몰려왔다. 난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 2월13일 새벽이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은 산성을 포위 파상적으로 공격해 왔다. 그러나 성은 끄떡도 하지않았다. 벽제관에서 명나라군을 대파 의기충천했던 왜군이라 쉽게 점령할 수 있으리라던 판단은 오산이었다. 반나절에 벌써 1만여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해야 했다.

 행주대첩에 있어 병사들 못지않게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부녀자들이었다. 육박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그녀들은 투석전에 쓸 돌을 앞치마로 날라왔다. 왜군이 섶을 묶어 성책을 불태우면 그녀들은 물을 길어다 불을 껐다. 권율장군도 스스로 병사들에게 물과 밥을 날라다 먹이며 독전했다. 이렇게 행주성 싸움 때 입었다고 해서 행주치마의 전설은 생겼고 왜군은 참패했다. 왜병의 80%가 희생되었다고 전한다.

 이때 대첩의 희보를 접한 명장 이여송은 예물을 보내 권장군을 축하했다. 다른 장수들도 이르기를 『권장군으로 인해 조선에 참된 장수가 있다는 것을 믿게 했다』고 칭송했다. 명제도 보고를 받고는 사자를 보내 위로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조선은 본래 강한 나라라고 했는데 권장군이 적을 많이 참획했다니 백성들이 사기를 떨칠만 하겠다』고 치하했단다.

 지금 승전의 현장은 고양시지도읍 한강변에 의연히 서있다. 지난 70년부터 대대적으로 정화 성역화하여 경향각지에서 찾는다. 인천에서는 남부순환도로와 행주대교를 통해 한달음에 닿을 수 있는 곳이니 학생들의 많은 견문이 가능하다. 406회 행주대첩제가 14일 거행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