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이 서러워한다./ 차갑게 꽃송이 속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종말을 향하여/ 여름이 가만가만 몸을 떤다…”
 시인 헤세의 ‘9월’ 구절을 읊조리니 새삼 경황없는 일상 속에 밀려났던 세월이 불연 듯 잊혀진 가락처럼 속마음을 비집고 나선다. 엊그제도 그랬다. 무심히 리모컨 옮기다 멈춘 곳이 요즘 한창 인기라는 연속극에 대한 관심이라 서가 아니라 장면배경을 적셔 나가는 주제곡이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였던 까닭이다.
 지금은 나이 지긋한 사람 아니고는 생소해진 이 곡과 모처럼 마주치니 불연 듯 나름의 낭만에 마음 설렜던 50 여 년 전 대구에서의 크리스마스 이브가 상기된다.
 아스라한 먼 그날 밤 인적 드문 한길에서 높고 맑은 클라리넷 소리가 나를 부르는 듯하여 끌려갔던가 보다. 모임을 파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을까 두 학생이 Y신문사 어득한 계단에 주저앉아 무아 속에 울리는 캐럴은 음유(吟遊)시인을 방불케 했다. 어느 명 연주가도 이끌어 낼 수 없는 감흥에 박수와 함께 이어 청한 앙코르 송이 바로 앞서의 소야곡이었다.
 이렇듯 혼자 누린 선사는 80년대 런던 튜브(지하철) 킹스크로스 역에서도 그러했다. 번잡하기로 이름난 곳인데도 유독 내가 빠져나가던 그 시간 통로는 행인이 없었고 모퉁이에서 첼로를 켜던 청년연주자가 보내던 미소와 선율은 매우 아름답고 장중했었다. 비단 이곳뿐 아니라 지하에서 마주치는 이러한 즐거움은 파리 메트로(지하철)의 경우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단순한 풍각쟁이가 아니다. 지하철당국은 품질관리를 위해 봄가을 엄격한 오디션을 실시하고 그 때마다 연주허가를 얻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으로도 입증하고 남는다.
 참 언제였더라? 부평서 차를 옮겨 타려 지하도를 가로지르는데 마침 ‘잉카 엠파이어’ 공연 현수막이 내 걸렸기에 구미가 당겼으나 공교롭게도 시간을 맞출 수 없었던 일. 마추픽추 유적 상공을 나는 새(‘엘 콘드 파사’)를 독특한 토속악기로 표현한 것을 듣지 못했으니….
 한편 지난 28일 서울시청 지하철 구내에서 ‘뉴욕 메트로’ 연주 팀 공연이 있다 하기에 어렵사리 쫓아갔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쟁쟁한 멤버 중엔 이미 15살 때 뉴욕 심포니와 카네기홀에서 협연한 전자 바이올리니스트하며 또 스스로 개발한 드럼연주의 강력한 비트는 폐부를 뒤집어 놓는 호소력이 담겨 넋이 얼얼했다.
 소음과 열악한 보행공간에서 비오듯 땀흘리던 출연자의 숨소리와 마주쳐 열광하던 카타르시스는 젊음의 고민과 이질을 동화시킨 멋과 신명이 담긴 값진 굿판에 비유해 봄직 했다.
 족히 수 백명을 헤아리는 청중은 이 삼십대였던 터에 오직 ‘Nobody cares about me’를 열창한 백발 흑인조차 나 보다 훨씬 손아래인 71세였으니 조금은 주책없나 싶어 눈치 보였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나이는 느낌이요 오십보 백보의 차이다. 불신과 갈등에서 벗어나기에 생동하는 록에서 지친 심신을 추스르는 충전의 계기가 되었다면 이게 얼마인가.
 각설하고 이 고장에서도 다양한 무대예술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 마음 든든하다. 차제에 누구나 부담 없이 언제 어디서나 어울려 즐길 수 있는 오픈 된 공간의 활성화가 기대된다.
 인천의 경우 부평역 등 몇몇 군데서 이따금 행사를 치렀다 만 아직 지하철예술무대라 이르기에는 미흡한 단계이고 그나마 여유공간마저 상가임대에 점차 잠식되어 가는 형편이다. 이와 관련해 시청역의 경우 어디 내 놓아도 손색없는 문화공간을 지녔건만 이용자라야 기껏 청소년끼리 펼치는 힙 헙 댄스(hiphop) 연습이 고작인 것 같아 안타깝다는 지적이다.
 하기야 서울지하철처럼 유명인의 초청이 쉬울까 만은 차선책으로 음악동호인 발표나 예술학도의 등용코스, 나아가서 살풀이 판소리를 펼 자리를 위해 개방해 봄직하다는 의견이다. 부디 여름 떠난 공백에 멋과 신명이 이어 나설 한마당 가꾸기에 인색치 말자는 당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