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여름기운이 서서히 가라앉는 산골 리조트를 찾았던 것이 엊그제 일. 세상사 어딜 가나 시원하겠는가만 정작 눈이 시리도록 펼쳐지는 자연경관과 마주치니 한결 숨통이 트인다.
 내친 김에 아쉬움 턴다면 은하수 가로놓인 밤하늘을 만끽할 것으로 지레 짐작했던 소박한 기대는 이곳 조차 옥외 전등이 밝아 추억 속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도시서는 별을 볼 수 없는 철부지들이 사이버 공간에서나마 유사환경을 미루어 짐작하는 형편이어서 안쓰럽고 이어 정다운 것들이 시들하는 추세에 마음 착잡하다.
 요는 잊혀져 가는 소중한 사안이 자연현상에 그치지 않는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는데 문제가 대두된다. 사람 사이를 오갔던 넉넉한 인정이 언제부턴가 알게 모르게 뒷전에 밀리고 본연의 정서가 거칠어가건 만 누구라 할 것 없이 ‘그런가 보다’ 개의치 않는 느낌이니 탈이다.
 이런 일련의 기색은 새벽 산책에서 마주친 낯모를 이웃에게 보낸 인사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좁은 길을 엇갈리며 “안녕하십니까” 했더니 예기치 않았던지 겸연쩍어 마지못해 응하거나 아예 외면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내처 젊은 일행이 올라오기에 나 딴에는 한 것 기분 맞추려고 “굿모닝” 했더니 ‘엽기적 노인 아니냐?’는 표정으로 스치지 않는가. 가만히 생각하니 아뿔싸, ‘굿모닝 시티’ 비리로 열 받는 시기에 아침부터 재수 없는 소리 던진다는 빈정거림을 의식한 것은 내 과민 탓만이 아닌 듯 싶었다.
 감언이설로 시민을 울렸던 ‘굿모닝 시티’와 순수하게 이웃에게 축복 보내는 ‘굿모닝’을 한통속으로 떠올리는 논리의 비약이 섭섭키는 했지만 이것이 우리 현실임을 어찌하랴.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인사와 함께 시선에 실린 미소는 신선하고 인간적 교류를 의식케 한다. 갓난아기가 어른에게 향하는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웃음을 영국에선 ‘사회적 미소’로 보편화되어 있거니와 우리는 꾸밈없는 사회적 기본덕목 키우기에 더욱 인색해진 작금이다.
 거리에서, 차내에서 마주치면 그 때마다 미소를 보내오는 이방인의 따뜻한 눈길에 처음에는 당황하고 싱거운 사람이다 싶었지만 쉬 감동으로 변하는 대목으로 기억된다. 런던의 경우 시민 70%가 앵글로색슨이 아닌 옛 식민지 출신인데도 누구라 할 것 없이 값진 기본 에티켓이 지켜지고 있는 것은 서로가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힌 오랜 전통의 산물이다.
 표제가 시사하듯 좋은 낯을 지닌 사람에게 모질 수 없다는 엄연한 우리 민속과는 달리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악의적 측면 없지 않은 것 또한 변명의 여지없는 현실상황이다.
일찍이 시인 김동환은 ‘웃은 罪’에서 인간의 기미를 감칠맛 나게 읊조린 바 있다. “지름길 묻기에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았지요/ 平壤城에 해 안든 대두/ 난 모르오/ 웃은 罪 밖에.”
 무릇 ‘굿모닝 시티’의 악덕배가 교활한 미소 뒤에 숨겨진 미소를 미처 헤아리지 못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가는 여기 일일이 거론하기 번거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은 罪’에 토를 다는 까닭은 오해 아닌 ‘사회적 미소’로 승화함으로서 이루어진 순수하고 격의 없는 인간관계 형성이 건강사회 정립에 보탬되리라는 것이다.
 누구든 좋은 낯으로 나서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꼬투리잡고 몰아세우지는 않으며 아무리 제 주장 옳다고 악 써도 일방통행은 막다른 골목 같아 공감 얻지 못하니 정치경제도 그렇다. 통일명제와 노사주장이 화려해도 남남갈등 덮어놓고 화합이란 빈 강정이요 얻을 것이 없다.
 대구 U대회슬로건처럼 ‘하나가 되는 꿈’을 실현하자면 사회전반에 웃는 낯을 키워야 한다. 속내야 어떻든 북한응원단원이 짓는 화사한 웃음에 우선은 너그러운 박수를 보내놓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