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三伏) 마루턱이라 시원한 구석이 보이지 않고 꼬리 무느니 일련의 자살 신드롬만 무성해 단내가 난다.
인천 모자 동반자살 등 일련의 사건에 대한 비판과 연민의 소리가 미처 가라앉지 않는 상황에서 이어 접한 정몽헌 회장의 자해의 충격파는 매우 크고 깊다.
무릇 자살은 어떤 의미에서든 살인 가운데서도 가장 지탄받아 마땅한 행동이며 동반자살의 비정함은 더욱 그렇다는 것이 상식적 견해요 옳은 말이다.
하지만 정 회장의 저승길을 지켜보는 보통사람 심정은 한편으로 죽음과 마주친 인간적 고뇌를 일컬어 현실도피라 단칼에 재단, 매도할 수 없는 아픔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수험공부로 인한 청소년의 강박관념, 가난과 빚에 쫓긴 결손가정이나 정치적 악연에서 헤어나지 못해 극도의 피로감을 불러일으킨 근본배경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는 지적이다.
80대 실향민이 정 회장 요절로 그나마 이산가족 상봉 기회가 막혔다며 비관자살 한 보도 또한 ‘사회적 타살’이라는 반성이 나설 법한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아무리 애써 바르게 살려해도 오히려 불의가 실리를 챙기는 부조리사회에서 밀려난 약자에게 강한 의지를 되찾게 할 주변 성원이 어느 정도 나섰던지 미심쩍을 따름이다.
정 회장 유서에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행동을 용서 바라오”라는 대목이 눈길을 끄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과연 그 같은 ‘어리석은 사람’을 사주한 자는 누구이며 ‘어리석은 행동’의 일정 몫을 부추긴 정치권은 아직 용서 빌고 나오는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이래서 자살한 자는 손해다.
어쨌거나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했다. 세상 등진 이면에 서린 한(恨)이야 별만큼 많아 맺힌 사연 이어 본들 한이 있겠는가 만은 자꾸만 연상됨은 무슨 까닭일까?
모자 투신자살 행적을 미루자면 모처럼 푸짐한 저녁상 차려주고 애들 표정을 지켜봤을 여인 얼굴이 오버랩 된다.
정 회장의 ‘최후의 만찬’ 또한 예외가 아닐진대 평소 자주 갖지 못했던 가족모임을 뇌리에 인화(印畵) 하려는 어버이의 안간힘이 눈에 선하기도 하고.
자살을 일컬어 순간적 충동이라 하거니와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꼴에 정상인도 울적하고 살맛 나지 않는 상황에선 사람은 누구나 염세인자를 지니고 있다 어느 날 분출할 따름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할 절망징조는 갑자기 나서는 ‘순간적 충동’이 아니라 ‘누적된 폭발’이기에 이상징조의 발견과 치유는 곧 배려와 관심의 유무에 좌우된다.
일러서 “자살할 힘을 지닌 사람은 행복하다”는 역설을 내 놓은 인물은 시인 테니슨. 이는 자살행위를 두둔함이 아니라 불의와 배신 앞에 죽을망정 지닌 바 신념을 굽히지 말아야 한다는 옹골찬 기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되며 이래야 자살유혹에서 탈출할 수 있다.
각설하고, 오늘은 추분(秋分)이자 정몽헌 회장의 발인. 옛 선인들은 복중에 싱그러운 가을을 미리 점쳤는데 그렇듯 남북화합의 큰 밑그림을 그려놓고 이를 견인할 하나뿐인 목숨을 모질게 접으니 아쉬움과 한이 덧쌓일 수밖에 없다.
이승 등진 원혼은 지금쯤 생전 아끼든 금강산 자락을 거닐까? 아니면 유명을 달리한 부자지간이 어울려 회포를 한가로이 풀고 있을 것일지?
살아 생전 못다 풀어놓은 무거운 사연에 향하는 궁금증은 호기심이 아닌 역사에 아로새길 숙제이기에 하찮은 한여름의 넋두리로 변질되지 않도록 명복을 빌어 이만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