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독기와 몸긔

우리가 평소에 망각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공기이다. 그러나 매연이 자욱한 공기가 우리를 엄습하여 숨쉬기조차 힘겨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때야 우리는 비로소 신선한 공기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평소에 무관심했던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태극기이다. 국경일을 맞이하여 거리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보게 되더라도, 우리는 무심하게 거리를 활보한다. 광복절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태극기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빈약하다.

태극기가 언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이 된 것일까? 행정안전부 홈페이지에서 “1882년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가면서 '태극·4괘 도안'의 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사실조차 알고 있는 이는 드문 편이다.

그런데 여전히 태극기에 대한 궁금증이 머리에 맴돈다. 고종은 왜 하필 태극과 팔괘를 국가의 상징으로 정하라고 박영효에게 명령했던 것일까? 태극과 팔괘가 우리에게는 어떠한 존재였기에 고종은 이를 상징으로 삼으려 했던 것일까?

헤르만 산더(1868~1945)는 일본주재 독일대사관 장교였다. 그는 러일전쟁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1906~1907년 사이에 한국과 만주 등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과 엽서 등을 남겼는데, 거기에 조선인 하은이 그린 '대한황제폐하 몸긔'라는 태극기가 있다. 고종 때에 이미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태극기라는 몸긔가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은 왜 태극기를 몸긔로 사용하게 되었을까? 조선왕조실록 고종 37년인 1900년 4월 17일 기사를 보면, <훈장조례>를 재가하여 반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여섯 가지 훈장 중에 '태극장(太極章)'과 '팔괘장(八卦章)'이 있었다. 이미 태극과 팔괘가 훈장으로 패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태극과 팔괘는 이미 조선의 군대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던 문양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주요 병서로 사용되던 <병학지남>에는 좌독(唑纛)이라는 기(旗)를 쓰는 호령을 밝힌 '명좌독호(明唑纛號)'라는 항목이 있고, 영조 25년인 1749년에 간행된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에는 좌독기에 대한 설명과 그림이 있는데, 여기에 태극과 팔괘가 그려져 있다.

태극과 팔괘의 원천은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이다. 하도는 복희씨가 천하에 왕 노릇할 때 용마가 황하에서 나오자 그 무늬를 본받아 팔괘를 그린 것이다. 낙서는 우왕이 홍수를 다스릴 때 등에 무늬가 있는 신묘한 거북이 나왔는데, 그 등에 있는 1에서 9까지의 점을 그린 것이다.

하도와 낙서는 동양철학의 근간일 뿐만 아니라, 병법의 근본 원리이기도 하였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하도와 낙서의 원리에 의하여 싸우면 승리할 수 있었다고 여겼던 것이다. 문종 때 편찬된 <진법>의 서문에 하도와 낙서에 대한 언급이 있다. 여기에서 수양대군은 진법 중에서 '연진(連陣)' 중에서 '외진(外陣)'과 '내진(內陣)' 그리고 '간진(間陣)'을 하도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합진(合陣)'과 '방진(方陣)'을 낙서(洛書)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예로부터 사용하던 태극과 팔괘를 국가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우주의 근본원리인 태극과 팔괘를 과감하게 국가의 상징하는 사용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가 유일하다. 천지와 사방을 상징하는 태극과 건곤리감(乾坤離坎)에는 우주적 기운이 압축되어 있는데, 이를 국기로 사용하는 우리에게는 우주적 기운과 소통하는 기질이 있는 것은 아닐까? 형이상학적 소질이 다분한 것은 아닐까?

▲ 송성섭 풍물미학연구소 소장
▲ 송빈산 우현미학연구소장

/송빈산 우현미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