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 간부로서 유대인 집단 학살을 기획하고 관리했다. 그는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들에게 체포돼 예루살렘으로 압송됐다. 그는 1961년 12월 사형을 선고 받고 1962년 5월 교수형을 당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아이히만을 악마가 아닌 비속한 인물로 그렸다. 그는 현대는 과거와 달리 지적·정서적으로 특이성이 없는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비속한 인물들이 술수만으로 권력을 쥐고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비속성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비속성(banality of evil)이란 말은 근대 문명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제조업 현장에는 명장이 사라졌다. 전쟁터에서는 용사를 볼 수 없다. 천재 역시 이윤 창출 시스템의 기능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예술계 거장들도 복제의 바다에 빠졌다. 돈벌이에선 개인의 탁월한 능력과 치열한 노력보다 자본의 힘이 압도적인 작용을 한다. 학생들의 성적도 사교육비가 좌우한다.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게 됐다.

비속화 추세가 두드러지는 분야는 정치다. 정치는 한 사회의 진로를 결정해 나가는 과정이며, 철학으로서의 가치관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 정치에서는 가치관과 철학이 없는 정치공학자들이 선거 승리의 전술을 발휘해 진지한 정치가들의 설 땅을 빼앗는다. 비속한 악이 판치는 정치권에서는 상식적인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형편없는 인물들이 선거철마다 전면에 떠오른다. 이들은 처세술에는 약삭빠르지만, 대체로 무능하고 부도덕하다.

거대 야당 민주당에선 비위 혐의, 자질 논란, 거짓 해명으로 여러 전·현직 의원들이 제명당하거나 탈당했다. 최강욱은 조국 자녀의 입시 비리를 도와 의원직을 상실했다. 뇌물수수죄, 불법정치자금 혐의로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의원도 있다. 입시 비리와 감찰 무마로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조국과 돈 봉투 사건으로 구속된 송영길은 검찰독재정권 심판을 외치면서 신당을 준비하고 있다. 21대 국회의원의 41%가 전과자다.

국회의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의민주주의에서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국회의원은 국가 발전을 위해 올바르게 판단하고, 국민을 위해 적절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청년실업, 저출산, 고령화, 주택문제, 지방소멸, 양극화, 먹거리와 일자리, 기후변화 등 대응해야 할 문제들이 많지만 정치권은 어떤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직무 유기다. 국민의 기대와 희망은 조금이라도 덜 비속한 인물들을 뽑아 정치의 미래를 안정화하는 것이다. 아무리 비속성의 시대라고 해도, 사리(私利) 대신 대의(大義)를 중시하는 인물을 찾으려는 노력을, 품격 높은 정치를 추구하려는 열정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 홍동윤 인천시 시민통합추진단 위원
▲ 홍동윤 인천시 시민통합추진단 위원

/홍동윤 인천시 시민통합추진단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