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송보국 앞장선 기업가 '종신지계' 실천하다

1945년 인천 해안동서 한진상사 창립
1956년 미8군과 군수 물자 수송 계약
미군 신용 기반 베트남 전쟁 특수 수혜
1968년 인하공대·대한항공공사 인수

1961년부터 이어온 학내 혼란 종지부
6년간 10억 투자·졸업생 계열사 취업
그룹 차원 전폭적 지원 바탕 '제2 도약'
1971년 말 문교부 종합대학 승격 인가
▲ 1960년대 인하공과대학 전경. /사진제공=인하대학교
▲ 1960년대 인하공과대학 전경. /사진제공=인하대학교

지난 2003년 문을 연 인하대학교 정석학술정보관 로비에는 '終身之計 莫如樹人(종신지계 막여수인)'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관자> '권수'편에 실린 '일 년의 계획으로는 곡식을 심는 일 만한 것이 없고, 십년의 계획으로는 나무를 심는 일 만한 것이 없으며, 평생의 계획으로는 사람을 심는 일 만한 것이 없다. 한 번 심어 한 번 거두는 것이 곡식이고, 한 번 심어 열 번 거두는 것이 나무이며, 한 번 심어 백 번 거둘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라는 의미에서 나온 문구이다. 인하대를 국내 굴지의 종합대학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조중훈의 교육관을 나타낸 의미로 풀이된다.

조중훈은 1968년 9월5일 정부로부터 인하공과대학을 최종 인수했다. 그리고 9월14일 대학 운동장에서 조중훈 인하학원 이사장 취임식이 거행됐다. 그동안 사학(私學) 재단으로서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에 있던 인하공대가 안정적인 이사진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인하학원 인수 당시 인하공대는 11개 학과에 2000명의 재학생을 둔 단과대학이었으나 4년 만인 1971년 12월31일 문교부(현 교육부)로부터 종합대학 승격 인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인하공대는 단과대학 체제에서 종합대학 '인하대학교'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문교부의 '인하대학교 설립인가서'에 따르면 공과대학(18개 학과 총 650명) 이과대학(3개 학과 총 100명) 경영대학(1개 학과 총 40명) 대학 2부(5개 학과 총 155명) 등 다수의 단과대학을 설치하게 됐다. 대학원에 석사 학위 과정 10개 학과와 박사 학위 과정 4개 학과를 설치하는 등 종합대학으로서의 위상을 펼치게 됐다.

조중훈의 인하공대 인수는 전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권고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인하공대가 사학 재단의 형식을 갖추기는 했지만 그 성격이 명확하지 않아 공적 자금의 투여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1960년대 말은 온 나라가 경제 개발에 매진하고 있던 시기였고, 정부가 인하공대에 투자하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정부는 인천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인 한진(韓進)의 조중훈에게 대학 인수를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훗날 조중훈은 자서전에서 대학 인수와 관련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정부는)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경제 개발 계획에 따른 기술인력의 필요성도 높아지던 터라 당시 정부에서는 더 이상 인하공대를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후원자를 물색하던 끝에 나에게 인수 용의를 물어왔다. 그 무렵 나는 한일개발의 설립과 인천 민자 부두 건설 계획 등 벌여놓은 사업이 많아 사학(私學) 운영은 감히 생각지도 못할 시기였다. 그러나 '언제든 여유가 있을 때 좋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는 평생토록 좋은 일 한 번 하기도 어렵다'는 마음에서 맡아보기로 작정하였다.” - <내가 걸어 온 길> 251쪽.

▲ 1945년 11월 한진그룹의 모태인 한진상사가 출범한 인천 중구 해안동 2가 9번지(현 한주통상 소금판매), 맞은편에 국내 최대 규모의 냉장창고 한진셀라리움(인천일보 뒤편)이 있다.
▲ 1945년 11월 한진그룹의 모태인 한진상사가 출범한 인천 중구 해안동 2가 9번지(현 한주통상 소금판매), 맞은편에 국내 최대 규모의 냉장창고 한진셀라리움(인천일보 뒤편)이 있다.

조중훈은 1945년 11월1일 인천시 중구 해안동 2가 9번지(현 인천일보 부근, 한주통상 자리)에 한진그룹의 초석이 된 한진상사(韓進商事)를 창립했다. 인천은 조중훈 수송 사업의 기반이었다. '한진'이라는 상호는 '한민족의 전진'을 의미하듯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한진상사가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알려진다.

조중훈이 인천지역을 사업의 근거지로 결정한 이유는 그가 젊었을 때 중국과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느꼈던 광대한 대륙과의 상호 무역의 커다란 기회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발발은 그 기회를 펼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쟁은 또 다른 분야에서 한진에게 기회였다. 비록 전쟁의 여파로 한진상사가 운용하던 대부분의 차량이 징발되었지만 조중훈은 사업 성공의 핵심 요소인 '타이밍 포착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게 된다. 물론 철저한 준비와 인천지역에서 꾸준하게 쌓아왔던 신용이 한진상사 부활의 결정적인 자산이 됐다.

▲ 1950년대 인천 중구 해안동 한진상사 창고. /사진제공=한진칼 홈페이지
▲ 1950년대 인천 중구 해안동 한진상사 창고. /사진제공=한진칼 홈페이지

1956년 11월, 한진상사 출범 11주년이 되던 해 조중훈은 주한 미8군과 군수 물자 수송 계약을 성사시켰다. 당시 경인지역에는 유력한 규모의 운수업체 50여개가 있었지만, 한진상사가 유일하게 자체 정비 공장을 운용하고 있어 주한 미군의 신뢰를 얻게 됐다. 조중훈의 노력으로 당시 1인당 국민 소득이 100달러도 안되던 시절, 7만달러에 이르는 미군 물자의 대리 수송 계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1957년 한진상사는 법인체인 한진상사주식회사로 전환돼 본사를 인천에서 서울로 이전했다.

1960년대는 조중훈에게 또 다른 차원의 도약을 가져다준 시기였다. 물론 항공 사업에서의 실패도 있었지만, 베트남 전쟁은 한진이 비상하게 되는 결정적인 기회였다. 조중훈은 주한 미군의 물자 수송으로 미군의 신용을 확보하면서 1966년 3월10일 주월미군사령부와 물자 하역 및 수송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조중훈이 수송보국(輸送報國)의 기치를 드높인 계기는 1968년 국영 기업인 대한항공공사의 인수이다. 대부분의 국영 기업이 만년 적자로 힘든 상황에서 항공공사 인수는 한진상사 대다수 임원들의 반대에 직면하게 됐다. 당시 항공공사의 누적 적자를 제외한 국내외 은행 빚만 해도 27억원이 넘었다. 베트남에서 벌어온 돈을 모두 투자한다고 해도 회생 가망성이 극히 낮은 항공공사 인수를 찬성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정부로부터 항공공사 인수를 제의받았을 때 조중훈은 해운공사 인수를 희망하기도 했다.

▲ 1968년 9월 조중훈 회장은 학교법인 인하학원을 인수했다. /사진제공=한진칼 홈페이지
▲ 1968년 9월 조중훈 회장은 학교법인 인하학원을 인수했다. /사진제공=한진칼 홈페이지

1968년 11월 조중훈은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결정하게 된다. '우리 한진상사가 월남에서 번 돈은 국익을 위해 재투자되어야 하며, 육해공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룬 수송기업의 구축은 나의 이상이다.'- <내가 걸어 온 길> 102쪽. 이는 한진상사 임원들의 차원 높은 이해와 협조를 구했던 조중훈의 생각이었고, '국익에 재투자'라는 이상은 1968년 인하공대 인수라는 육영사업에까지 영역을 확대하는 계기였다.

외형적으로 사학 재단이었지만 인하공대는 1961년부터 1968년 사이에만 10명의 임시 이사장이 취임하는 등 정부의 출자 없이는 대학 운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한진상사와 한일개발 설립 그리고 항공공사 인수 등 사업 영역이 확대되고 있는 과정에서 조중훈의 인하공대 인수는 또 다른 차원의 투자가 필요한 결단이었다.

인하공대가 인하대학교로 제2의 도약을 시작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은 한진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에 있다. 한진, 대한항공, 한일개발, 동양화재 등 한진그룹 계열사들은 인하대학교 재정 재산 조성, 그리고 졸업생의 취업에까지 전방위적으로 육영사업에 참여했다.

1968년 인하공대 인수부터 1974년까지 인하대학교로 대표되는 인하학원에 대한 재산 조성과 재정 지원 투자 총액은 10억원이 넘었다. 이 중에서 한진그룹 각 계열사가 분담한 재정 지원만 해도 7억원 이상이었다. 1971년 12월에는 조중훈 인하학원 이사장의 부친인 조명희도 개인재산 6200여만원을 인하학원에 기부했다.

이제 인하대학교 나이 70세를 맞이한다. 제2의 도약기를 거쳐 제3의 창학을 준비하는 시기에 지나온 역사를 흘려보내서는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인하대는 하와이, 인천, 제1공화국 그리고 1960년대 말과 1970년대를 거쳐 영욕의 시대를 지나왔다.

현재의 사학 재단 인하학원은 조중훈이 염원한 '終身之計 莫如樹人'의 정신을 잘 살리고 있는지 늘 확인하고 또 확인해 나가야 할 때다.

▲ 양윤모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 양윤모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양윤모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학교법인 인하학원 제12대 조중훈 이사장 취임사 요지(1968. 9. 14)

오늘 본인은 고(故) 이승만(李承晚)박사께서 설립하신 유서 깊은 학교법인 인하학원(仁荷學園)의 이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음을 생애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본시 육영사업은 국가발전의 기본이며 교육은 슬기로운 우리의 과제입니다. 인하학원을 맡게 된 저의 소신도 조국근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기술인의 양성과 그 성장을 위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 책임이 중차대함을 재삼 느낍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공학의 전당인 인하공대가 나라와 겨레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책임과 사명을 함께 다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갖고 있는 꿈을 현실화해야 되겠습니다. 이 꿈은 참다운 인재양성이며 이 과제를 수행함에는 여러분의 성의와 노력이 무엇보다 요구됩니다. 국가와 겨레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부단히 연구하고 공부하는 학원으로의 풍조를 이룩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합심 협력해야 되겠습니다. 이 합심 협력은 명실상부한 인하의 발전을 약속할 것이며, 이는 합리적인 재정지원과 학원운영을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본인도 재단이사장으로서 책임을 다할 것은 물론, 인하학원의 발전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아끼지 않겠으며 연구하는 교수, 공부하는 학생,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사무진 각자가 본분을 다함으로써 비로소 소기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학생 여러분께서는 기술만을 다루는 공학도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과 덕망을 지녀야 되겠습니다. 전문지식에만 치중하여 기계적 기술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적어도 국가산업의 일익을 담당할 한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는 기술인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본 학원의 발전에 있어서 교수 여러분의 역할이 바로 중추가 됨은 재론을 요하지 않습니다. 참다운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는 교수 여러분의 배전의 연구와 노고가 요구되며 본인도 이에 대한 충분한 지원을 약속합니다. 당초 인하공대의 설립 목표인 동양의 MIT를 이룩할 것을 다짐하며 다시 한번 본 학원의 발전을 위해 성과 열을 다하여 봉사할 결의를 표하면서 내외귀빈 및 학내 여러분의 변함없는 지도편달과 협력을 빌어 마지 않습니다.

/인하대학교 총동창회·인천일보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