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자나 깨나 불조심”. 어릴 적부터 자주 보던 표어다. 예나 지금이나 불은 경계의 대상이다. 잘 쓰면 아주 유용하지만, 잘못 건들면 참화로 이어질 수 있다. 화재엔 예방이 최선이지만, 대처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얼마 전엔 잇단 도심 아파트 화재와 관련해 주요 관계 기관 대책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계절적 특성에 따른 난방 기구 사용 증가와 화재 발생의 대형화 등에 대비하자는 취지에서다.

이런 화재 예방·대응과 연관해 인천에서 소방이 상시·체계적 조직을 갖추고 운영된 지는 얼마나 됐을까? 1883년 개항 직후부터라고 하니, 꽤 오래됐다고 여겨진다. 개항 후 인천으로 외지인들이 몰려들고 물자 왕래가 활발했던 만큼, 화재를 중요시했음은 당연했을 터이다. 1884년 11월18일 인천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거류민 간사 협의를 통해 전문적인 '사설 소방조'를 설치했다고 알려진다. 올해로 140년을 맞은 셈이다. 인천 소방의 시작은 1889년 2월 결성된 '경성 소방조'보다 무려 5년을 앞섰다고 한다.

관문 도시 인천엔 문호를 개방하자마자 각국 영사관과 거류지(조계) 설치 등이 잇따랐다. 외국의 신문물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도착한 곳으로 꼽혔다. 인천에서 '국내 근대 소방 문화'가 처음 시작한 이유다. 인천의 소방 제도는 1883년 해관(현 세관) 과세 업무에 '구화(救火·소방) 기구' 항목을 규정함으로써 제도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듬해 영국과 체결한 통상조약엔 소방 기구 도입을 허가한다고 명시했다. 일본과 청나라 거류지가 자율적으로 소방조합을 결성한 배경이다.

인천에선 1907년 대형 불이 나서 큰 피해를 당했다고 보도됐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3월6일자 신문에서 '인천항에서 실화하여 민가 400여호가 연소하였는데 그 화재 원인과 인명 상부상을 현금 조사하는 중'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후속 보도에선 피해 가옥이 500여 채로 늘었다고 전했다. 그런 다음 인천지역 소방기관은 더욱 확대돼 화재 예방을 중요한 과제로 삼기도 했다.

인천소방본부가 최근 소방 관련 자료들을 새로 조사·발굴한 책을 발간해 관심을 모은다. <인천 소방 139년, 안전을 위해 달려온 열정과 패기>를 제목으로 달았다. 인천 소방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 인천소방본부의 조직·행정 체계와 분야별 발전상, 소방관들의 인터뷰와 현장 화보 등을 담았다. 인천 소방의 발자취가 우리나라 근대 소방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 의미를 더한다. 이렇게 인천 소방이 걸어온 과거를 재조명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자산으로 활용하는 일에 박수를 보낸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