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와 신시도 연도교를 거쳐 이르는 시도 아랫마을(하동), 이 일대는 면사무소, 파출소 등이 모여있는 시도의 중심지이다. 이 마을 도로변에 시도의 역사와 함께하며, 밖으로는 차분하면서도 안으로는 복음이 충만한 작은 교회가 있으니 그 교회가 바로 시도교회다. 현재 김옥태 목사가 시무 중에 있으며, 마을 사람 대부분이 이 교회의 교인이다. 지금까지 지역 주민이 두터운 신앙을 매개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정신적 일체감을 주는 교회로 성장했지만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자료는 많지 않다. <북도교회100년사>에는 교회의 설립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갈등과 따돌림, 설립자 박준출 마을을 떠나다
그가 한문 서당에 훈장으로 있을 때 신도리 고남마을에 기독교가 먼저 정착했다. 그리고 시도에 복음을 전하려고 여러 번 노력하였지만 주민들은 기존에 전해 오는 토착 민간 신앙 즉 도당굿의 강세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웠다.
박준출씨는 하춘택 전도사의 전도를 받아 신도 고남리 전영관씨 집과 염촌 리홍조씨 집에서 믿음의 식구들이 모여 간소한 예배를 드렸다. 시도리 거주 김실봉 가정이 새로이 기독교를 믿게 되니 이때부터 시도리에서 두 가정이 한데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반대 세력의 위력이 커서 좀처럼 빛을 보지 못했다가 김실봉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조카 김만조씨가 그 신앙을 계승하였다. 그 후 김만조씨는 시도를 떠나 영등포중앙교회 장로로 시무하였고, 박준출 전도사는 도당굿파 밑에서 기독교 신자라는 따돌림으로 자식들의 결혼 문제까지 영향을 받아 생활이 길이 막혀 신앙 동지들을 찾아 강화군 양도면 삼흥리로 이사하였다. 수년간 강화에 머무는 동안 목적이 변경되어 생활 기반을 잡지 못하고 곤궁한 생활을 거듭하였다. 성서 누가복음 속에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연상하며 내가 이곳에서 고생을 하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 복음의 터전을 만들어 놓고 죽겠다는 각오로 시도리로 다시 돌아왔다.
박준출 전도사, 1930년 교회를 설립하다
황무지 같은 환경 속에서 사는 동안 시도 강습소 교원으로 한기동씨가 부임하였다. 이분이 기독교도인 까닭에 그 집에서 예배를 드렸으나 한기동씨가 전근하니 예배처는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러나 점차 생활이 안정되어 평생소원인 예배처를 만들기로 결심을 굳게 하고 강화도 화도면 어느 강습소 한 채를 헐어다 외부의 도움 없이 목수 일을 하면서 예배당을 지었다. 1930년에 시도리 산 117번지에 26㎡(8평) 규모의 초가집 예배당이 세워졌다. 그러나 신자가 없어 교회 역할을 못 하고 기도처로 있었다.
그러나 박준출은 전도사 직분을 가지고 오랫동안 노력한 끝에 김성애씨가 교회에 참여하였다. 한편, 남자 청년 김호신씨는 서울 배재학당에서 공부해 고향과 떨어져 지냈지만 주일학교 정신이 살아 있어 교회의 원입인으로 있다가 1934년 11월 17일 임진국 목사에게 김성애씨와 같이 학습 세례를 받아 입교하였다. 1935년 당회 때 두 사람이 같이 속장으로 최선을 다하였다. 박준출 전도사는 이미 연로한 몸이었고, 자식 직장을 따라 황해도 옹진군 동남면 어화도로 이사하게 되었다. 김성애 속장과 청년 김호신 속장에게 교회 일을 일임하고 교회를 떠날 때 서글픈 심정으로 이별하였다. 해방이 되자 박준출 전도사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 시도리로 월남하여 오셨다. 그 후 노년을 지내시고 노환으로 별세하여 시도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제 교회는 김성애와 김호신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 부녀자 20여 명과 함께 힘을 모아 교회를 두 번째로 신축하게 되었다. 1953년 122번지 산 중턱에 예배당 대지를 조성하고 3년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66㎡의 현대식 양옥집이었다.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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