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조합에서 간척한 농경지

북도면 신도(信島)와 남북으로 마주하는 영종도, 지금은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배로 10분이면 닿은 가까운 곳에 두 섬이 위치한다. 경향신문(1959년 3월16일자) '영종도서 재생의 길 얻은 난민 집단-염전 완성 단계, 천주교 구제회서 식량 일체 제공'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황해도 연백, 송화 등지에서 228세대 1305명에 달한 피난민이 1957년부터 천주교구제회(NCWC)의 지원 속에 간척 사업을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서해도서철수난민영종조합(조합장 김형찬)을 결성하고 2000m의 제방을 쌓고 염전 완성을 앞두고 있다”는 내용이다. 영종도에서 간척사업은 “4290년(1957) 2월 보건사회부에서 첫 구호를 시작하면서부터 동년 5월에 천주교구제회가 본격적으로 구호의 손을 뻗쳤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국가적 차원에서 벌이는 사업의 초창기에 해당하는데, 이웃 섬인 신도에도 식량 지원을 통한 간척 사업의 소문을 듣고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신도3리, 신촌의 '공생조합' 간척 역사

황해도 용매도에서 살다가 6·25 전쟁으로 피란하여 장봉도(4리)에 정착해서 살았다는 차학원씨, 그는 신도에서 바다를 막아 땅을 만드는 피란민 정착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신도4리로 이주했다고 한다. 즉, 1950년 6·25 전쟁으로 황해도 옹진, 연백 등지에서 피난하여 장봉도에서 거주하던 70여 세대가 생계유지를 위하여 수원이 풍부하고 넓은 갯벌이 있는 염촌(鹽村, 신도3리)으로 이주했고, 이들은 난민정착 사업을 하는 천주교구제회의 식량 원조를 받기 위해 간척사업에 동참했다. 이렇게 해서 실향민들이 만든 조합이 서로 도우며 같이 살자는 의미의 '공생조합'을 만들게 되었다. 조합원은 이주해 온 실향민 세대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김완식을 비롯하여 약 65명으로 구성되었다. 조성 연도는 1957~59년이며, 제방 길이 700m, 면적은 40㏊이다. 제대로 된 도구 없이 지게와 손수레로 땅을 만들었으며, 한 가구당 배당되는 땅은 3천 평(1㏊)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염기로 인한 토질의 편차로 좋은 땅, 나쁜 땅 하나씩 2필지로 가졌다. 벼농사는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했다고 하며, 농사를 짓지 못하는 간척지는 염전을 운영했는데 아직도 소금창고나 염부가 잠시 쉬던 집도 일부 남아 있다. 이 당시 간척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사람은 토지를 매매하고 출도했다고 한다. 한편 이 사업을 계기로 천주교 신자가 늘어났다고 한다.

 

신촌(신도4리) '삼성조합' 간척의 역사

공생조합을 통해 간척을 완성한 뒤 간척의 노하우를 통해 피난 온 주민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20여 가구가 '삼성조합'이라는 모임 아래 농경지 조성을 위해 간척을 하게 되었다. '공생조합'에서 간척한 토지와 맞닿아 있으며, 햄섬을 중심으로 좌우에 위치한다. 조성 연도는 1962~65년이며, 제방 길이 400m, 면적은 12㏊이다. 이 조합의 대표자는 송창이며, 조합 땅은 개인 사유지이다. 일본식 용어인 '우깨도리'라는 방식을 취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이런 과정에서 '평띠기'라는 용어가 생기기도 했다. 이 현장에서 한 평은 가로·세로·깊이는 모두 1.8m를 말하며, 팀웍이 맞는 3~4명이 조(組, 팀)를 이뤄 역할 분담했다. 간척의 노임은 일한 면적만큼 일당으로 계산했다고 한다. (이용선, 최영윤 증언)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