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 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 준다

 

손 위에 번져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 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박범신의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늙음은 죄가 아니다. 노인의 손과 얼굴에 피어난 검버섯 또한 원래 태어날 때부터 피어 있던 죽음의 꽃이 아니다. 늙은이의 몸에도 따스한 피가 흐르고 있고, 완강한 떨림으로 침묵을 움켜쥐고 있으나 그의 영혼은 삶의 풍경을 응시한다.

가까이하기 힘든, 원래 '세상 구석'에서 태어난 것 같은 그는 나와 다른 세계를 사는 이방인이 아니다. 어느 순간 '침묵'이라는 불청객이 불쑥 찾아와 몸을 무단점거하고 있을 뿐, 처음부터 '구석'의 삶을 살았던 이가 아니다. '어느 날 침묵이 비워진 자리'에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는 한 생애를 망각의 강물 위로 흘려보낸다, 사람들은 그 쓸쓸했던 침묵의 과거를 애써 기억에서 지우며 미래를 향해 걸음을 옮기지만, 그 의자에 앉았던 이는 바로 미래의 나,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죽는 순간 21g의 몸무게가 줄어든다고 한다. 그것은, 육체는 생로병사를 거쳐 초라하게 사라지나 영혼이란 것이 있음을 물리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증거다. 육체가 사라지고 나면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는 것이 허무한 인간사라 해도, '빈 의자'에는 여전히 누군가가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생애는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쓸쓸한 '빈 의자'에는 21g의 영혼의 무게가 앉아 우리를 늘 지켜보고 있었다.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br>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

/권영준 시인·인천삼산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