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토박이 시인 권혁재]

2004년 등단 이후 꾸준하게 활동
재개발 앞둔 삼리 배경 '토우' 유명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존재들 노래”

“그날이 서울을 가려고 평택역에서 기차표를 예매해 놓고 대합실에서 나와 창밖을 바라보니 불빛이 켜진 곳이 보였습니다. '삼리'였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어서 갑자기 시가 생각 나 쓰게 됐습니다.”

지난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평택 토박이 권혁재(60·사진) 시인의 기억이다.

권 시인의 등단작 '토우(土雨)'가 나온 배경이다.

현재 평택 성매매 집결지에서는 사라져갈 이곳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도시 재개발 지역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면서 주위의 시선을 끌고 있다.

평택역 인근에 자리 잡은 집장촌 일명 '삼리'를 배경으로 한 권 시인의 '토우'는 평택 제1 구역이 역사 속에서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으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권 시인은 '토우'에서 일찍이 경부선 철길 옆 누이들의 삶을 시의 언어로 끌어안았다.

삼리는 누구나 알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쉬 입에 올리지 않는 유령 같은 공간이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을 상대로, 한국 전쟁 이후에는 미군을 상대로, 평택 삼리의 여성들은 이 땅의 아픈 곳에 눌러앉은 상흔처럼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시인은 삼리의 여성을 누이라 불렀다.

이들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평택역 근처에 머물면서도 차마 꿈길을 따라 떠나지 못하는 아픈 상처의 대명사다.

그는 이들 삼리 누이들의 삶을 문학의 언어로 아울러 품었다.

권 시인은 '평택 삼리에 내리는 비릿한 토우'의 냄새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내년이면 작품 활동을 한지 이십 년이 되는 권 시인은 생업이 끝나는 시간이면 시의 깊이를 재는 밝은 눈이 절실했기에 문학 작품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단국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꾸준히 시를 썼고 현재 아홉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이론서가 세상에 나왔다.

그를 처음으로 문학의 마력에 빠지게 만든 작품은 중학생 시절 만난 황순원의 '소나기'였다.

빛나는 묘사와 담백하고도 긴 여운을 남긴 이 소설에 반한 중학생은 온 서점을 돌아다니며 “소나기 2편 아직 안 나왔나요?”를 애타게 물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는 1980년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겨울 방학, 드디어 운명처럼 한 시인을 만난다.

아르바이트로 신문배달을 하는 형이 가져온 신문 속에서 그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 '체슬로브 밀로즈'의 작품을 읽게 됐고 대문호와의 조우는 소년의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이때부터 권 시인의 마음 속 한자리에 소외된 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과 아픔 등을 시로 표현하겠다는 마음이 자리를 잡았다.

이 때문인지 권 시인은 대신 울어주는 사람 '곡비'에 비유되곤 한다.

권혁재 시인은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소외된 존재들을 노래하는 시가 많은 건 사실”이라며 “시는 시 자체로 존재하고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이 척박한 사유의 땅에 시심을 꾹꾹 눌러 심어 기어이 한 포기 시의 꽃망울을 터트리는 그날이 오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한자 한자 적고 있다”고 말했다.

/평택=오원석 기자 wonsheok5@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