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나례를 담당했던 이들을 양수척이라고도 하며, 화척이라고도 하고, 광대라고도 하고, 재인이라고도 하며, 우인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어떠한 계층이었을까? 이들에 대한 단서를 우리는 세조 2년인 1456년 3월 28일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대개 백정(白丁)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단(韃靼)'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국가에서 그 제민(齊民)하는 데 고르지 못하여 민망합니다. 백정(白丁)이라 칭하여 옛 이름[舊號]을 변경하고 군오(軍伍)에 소속하게 하여 사로(仕路)를 열어 주었으나, 그러나 지금 오래 된 자는 5백여 년이며, 가까운 자는 수백 년이나 됩니다. 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유속(遺俗)을 변치 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둔취(屯聚)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혼가(婚嫁)하는데, 혹은 살우(殺牛)하고 혹은 동량질을 하며, 혹은 도둑질을 합니다. (…) 그 홀로 산골짜기에 거처하면서 혹 자기들끼리 서로 혼취(婚娶)하거나 혹은 도살(屠殺)을 행하며, 혹 구적(寇賊)을 행하고 혹은 악기(樂器)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경외(京外)에서 통금(痛禁)해야 합니다.”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이 농사를 생업으로 삼지 않고 산 골짜기에 모여 살며 노략질을 일삼았던 것은 고려 때부터였으며, 이들을 백정(白丁)이라 고쳐 부르게 된 것은 세종 때의 일이었다. 일반 백성들이 그들을 다른 이라 여겨 그들과 혼인하는 것을 꺼리게 되자, 칭호를 백정(白丁)이라고 고쳐서 평민과 서로 혼인하고 섞여서 살게 하며, 그 호구를 적에 올리고, 경작하지 않는 밭과 묵은 땅이 많은 사람의 밭을 나누어 주어서 농사를 본업으로 하게 하고, 사냥하는 부역과 버들그릇[柳器]과 피물(皮物)과 말갈기와 말총, 힘줄[筋]과 뿔 등의 공물을 면제하여 그 생활을 편안하게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달단(韃靼)'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태조실록에서는 “북계(北界)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달단은 몽고계의 유목민 즉 타타르 부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재인이나 백정과 달리 양수척(楊水尺)은 유기장(柳器匠)이었다. 이들은 본래 관적(貫籍)도 부역(賦役)도 없이 물과 풀을 즐겨 따르며, 늘 옮겨 다니면서 오직 사냥만 일삼고 버들을 엮어 그릇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써 생업을 삼았다. 성호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의 「경사문(經史門)」에 의하면, 기생은 본래 양수척에서 나왔다고 한다. 기생과 양수척, 재인은 그 뿌리를 살펴보면 하나였던 것이다.
인조 4년인 1626년(병인년) 때 명나라의 셋째 황태자가 탄생한 것을 알리기 위해 중국에서 사신이 왔는데, 이때 영접도감을 설치하여 환영하고 나례를 펼쳤는데, 이에 대해 기록한 것이 바로 <나례청등록>이다.
<나례청등록>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6월 13일에 하마연을, 14일에는 익일연을, 15일에는 숭정전에서 회례연을, 16일에는 제천정에 나가 놀면서 배를 타고 양화도까지 내려갔다. 17일에는 남별궁에서 회례연을 하였고, 19일에는 잠두(蠶頭) 즉 지금의 잠실 부근으로 나가 놀았는데, 선유봉에 이르러 황혼이 되어 배를 돌렸다. 20일에는 남별궁에서 상마연을 베풀었고, 21일에는 백성들이 길을 막고 사신을 환송하였는데, 그 수가 1만5천~1만6천에 이르렀다. 이때 나례에 사용되는 윤거(輪車)와 잡상(雜像)은 좌우나례청에게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때 제작한 것으로는 헌가(軒架) 하나, 솟대(嘯竿) 하나, 승호(乘虎) 하나, 입사자(立獅子) 하나, 낙타(駝) 하나, 절요마(折要馬) 하나, 쌍족죽(雙足竹) 하나, 척족죽(隻足竹) 하나, 근두목마(斤頭馬木) 하나였으며, 줄타기에 필요한 물품들도 준비하였다. 이때의 나례에는 무녀(巫女)도 참여하였는데, 이에 소용되는 장고(長鼓)는 둘이었다. 또한 각도에서 참여한 재인들의 명단도 기록하였는데, 전체 재인은 총 284명이었다. 전라도의 재인이 170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충청도가 52명, 경상도가 33명, 경기가 29명이었다.
상색재인(上色才人)이 거론되었으나 이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없다. 나례를 할 때 음악 연주와 희극은 전적으로 광대들이 맡아 하는 일이었다. 보통 세 차례 연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색재인은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그런데 과거에 합격한 거자들이 상색재인을 데리고 멀리까지 가서 축하연을 한 이후에 아직 올라오지 않아 잡색재인(雜色才人))만을 가지고 연습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1619년 광해 11년 9월 13일 기사).
인조 4년인 1626년(병인년) 나례 때 필요한 각종 업무를 심부름하던 사령(使令) 중에는 박줏동(朴注叱同)이 있었으며, 충청도 이산(尼山) 지역의 재인으로는 연산(連山)에서 옮겨온 줏동(注叱同)이 있었는데, 주질(注叱)이라는 용어를 통해 그들이 줄타기 재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조선시대 불서인명 DB에도 줏덕(注叱德), 줏개(注叱介), 줏동(注叱同), 줏비(注叱非), 줏쇠(注叱金), 방줏동(防注叱同), 이줏동(李注叱同), 박줏손(朴注叱孫), 이줏쇠(李注叱金), 박줏쇠(朴注叱金), 허줏산(許注叱山), 장줏쇠(張注叱金), 양줏동(梁注叱同), 김줏수리(金注叱愁里), 김줏사리(金注叱沙里) 등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줄타기 재인들의 경우 대부분 줏(注叱)이라는 특화된 명칭을 쓴 것으로 보인다.
/송성섭 풍물미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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