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약 없는 기다림…실향민 “살아생전 고향 땅 밟았으면”

남북 분단으로 고향·가족 동시에 잃어
실향민들 70년 지나도록 여전한 그리움

강화서 추석맞이 '이북도민 망향제'
윤상익씨 등 인천 실향민들 귀향 고대
“영영 가족 못 보게 될 줄 생각도 못해”
“북한 사투리만 들어도 부모 생각나”

'실향민'. 전쟁이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분단과 전쟁으로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에게 고향은 닿을 수 없는 땅이다.

'이산가족'은 남북 분단으로 흩어져 서로 소식을 모르는 가족을 의미한다. 고향과 가족을 동시에 잃어버린 실향과 이산의 아픔은 끝없는 기다림으로 남았다.

전쟁으로 그어진 선은 고향 땅과 삶의 터전을 갈라놓았다. 70년 세월이 지나도록 실향민이자 이산가족인 이들은 그리움 속에 살아간다. 지난 17일 인천 강화군 양서면에 있는 평화전망대에선 '추석맞이 이북도민 망향제'가 열렸다. 망향제는 한 맺힌 사연들을 품고 있었다.

▲ 함경북도 출신으로 인천에 살고 있는 실향민 윤상익(93)씨.
▲ 함경남도 출신으로 인천에 살고 있는 실향민 윤상익(93)씨.

▲“잠깐의 피난, 생이별이 될 줄은”

함경남도 북청군에 살았던 윤상익(93·남동구 간석동)씨는 1951년 '1·4 후퇴' 당시 사촌 형과 함께 배를 타고 경남 거제도까지 내려왔다.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70여년 세월이 흘러 윤씨는 망향제에서 그때 기억을 떠올렸다.

“추운 겨울이었으니까 국군이 일시적으로 후퇴했다가 다시 올라올 것이라는 얘길 들었어요. 남자들은 북한군이 들이닥치면 끌려갈 수 있어서 잠깐 남쪽에 내려가 있으라고 했어요. 그렇게 떠난 게 영영 가족들을 못 보는 일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지.”

같은 집에서 지내던 부모님과 한 살 어린 여동생은 그대로 북에 남았다. 윤씨와 사촌 형, 둘만 덩그러니 거제도로 떨어졌다. 이들 사촌 형제는 차례로 입대해 병역을 치렀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사촌 형은 먼저 다른 부대로 가서 소식이 끊겼고, 윤씨 홀로 삶을 꾸려야만 했다.

순탄치 않은 인생이었지만,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며 살아갔다. 1983년에는 이산가족 찾기 행사에 나가 뿔뿔이 흩어졌던 친척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다른 배를 타고 내려온 오촌 조카와 사촌 동생도 있었다.

윤씨는 “이제는 이북에 있는 고향이 그립지 않다”는 말로 실향의 아픔을 달랬다. 체념하지 않고는 버티기 어려운 세월이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이 이미 나이가 많아 지금까지 살아 있을지 가늠하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이산가족 찾기 신청도 안 했어요. 사촌 형님이 통일부로 몇 번 찾아가도 이산가족과 상봉도 못했으니까.”

▲ 지난 17일 인천 강화평화전망대 망배단에서 ‘이북도민 추석 망향제’가 열리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 지난 17일 인천 강화평화전망대 망배단에서 ‘이북도민 추석 망향제’가 열리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살아생전 고향에 가볼 수 있을지”

이달 17일 평화전망대를 찾은 김모(79·여)씨는 홀로 망향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씨 부부는 해마다 이곳에 방문해 고향 땅을 보곤 했지만, 올해에는 남편 이모(88)씨가 병세가 깊어진 탓에 함께 오지 못했다. 그는 망향비 옆에 놓인 망원경으로 노랗게 물든 황해도 땅을 바라봤다. 김씨는 “우리 양반과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 이씨는 황해도 연백군에서 나고 자랐다. 그가 고향을 떠나 인천에 내려온 시기는 1951년 1·4 후퇴 이후다. 황해도에서 다시 포성이 울리자 이번엔 갯벌을 건너 강화도 땅으로 향했다.

“난리도 아니었다고 들었어요. 남편과 아버지, 형님 세 부자가 같이 갯벌을 뛰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형님이 갑자기 넘어졌다고 해요. 총탄에 맞은 줄 알았더니 '나 안 죽었다'고 외쳐서 부축해 데려오면서 겨우 갯벌을 건너올 수 있었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렇게 삼부자의 피란길은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길이 돼버렸다. 김씨는 남편이 고향을 계속 그리워했다고 한다.

“사위가 경기 파주에 사는데 한번은 고향을 보러 가자고 하면서 접경지에 가서는 '저 너머 어딘가가 우리 집'이라고 일러주기도 했어요. 혹시나 고향에 친척이나 이웃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산가족 찾기 사업에도 계속 참여했는데 돌아온 답은 없었죠. 살아생전 남편이 고향에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오늘 찍은 사진이라도 우리 양반에게 보여주려고요.”

▲ 실향민 2세대로 인천지구 이북도민연합회를 20년 가까이 이끌고 있는 이인철(73) 회장.
▲ 실향민 2세대로 인천지구 이북도민연합회를 20년 가까이 이끌고 있는 이인철(73) 회장.

▲“북한 사투리만 들어도 부모님 생각”

“누군들 고향이 그립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먹고살기 바빴으니까.”

1951년 1월1일 인천에서 태어난 이인철(73)씨는 실향민 2세대에 속한다. 2000년대 초부터 인천지구 이북도민연합회장을 맡고 있다. 그의 아버지 이승섭(1966년 작고)씨와 어머니 김필순(1996년 작고)씨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한 번도 북한을 가본 적이 없어도, 함경도 사투리를 들을 때면 반갑게 인사할 때가 있다고 한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평소 함경도 사투리를 썼기 때문이다.

“가끔 식당에 가면 연변에서 온 중국 동포들 목소리를 들을 때가 있잖아요. 그들 중에는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곤 하죠.”

함경남도에서 살림을 꾸리던 그의 부모는 1950년 초에 삼팔선을 넘어 인천 중구 신생동으로 왔다. 당시 삼팔선을 넘나드는 것은 금지된 행위가 아니었다.

평소 고향에 대한 기억을 많이 꺼내진 않았지만, 부모님이 가졌던 그리움을 그도 모르진 않았다. 이씨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도 실향민들이 함께 빈소를 지켰다.

“어머니와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찾아오신 분들이었어요. 그때 실향민 사회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죠.”

그 뒤로 이북5도 출신 실향민들과 꾸준히 교류했던 이씨는 20년 가까이 인천지구 이북도민연합회장을 맡았다. 연합회는 실향민과 2·3세대들이 참여하는 망향제를 이어가고 있다.

“실향민들은 오매불망하며 고향에 가길 기대하고 있는데 현실을 보면 점점 어려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고 고향 방문에 대한 희망을 접을 수 없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죠. 망향제를 통해서라도 실향민들이 처한 현실을 시민들에게 계속 환기시키려고 합니다.”

 


 

멀어진 사회적 관심…기억 보존 행사·기록 작업 필요

 

인천 이산가족 3291명 생존

남북관계 경색 방북 상봉 중단

'3291명'. 지난달 기준 '남북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 가운데 인천 생존자 수다.

24일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을 보면 전국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3685명 가운데 4만408명이 살아남아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인천 이산가족 생존자는 경기(1만2202명)·서울(1만270명)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비율(8.1%)을 차지한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70년이 지나면서 실향민 1세대들은 고령화에 직면하고 있다. 전국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를 연령별로 보면 '90세 이상'이 30.5%에 이른다. 인천 역시 2020년까지만 해도 4023명이었던 생존자 수가 2021년 3758명, 지난해 3452명으로 해마다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를 보인다.

이산가족들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남북 관계 경색으로 상봉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남북 이산가족 교류는 2018년 833명의 방북 상봉을 끝으로 중단됐다. 당국 차원의 상봉은 물론 생사 확인, 서신 교환마저 5년째 끊긴 상태다.

통일부는 지난 2월 '제4차 남북 이산가족 교류 촉진 기본계획(2023∼2025)'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 재개, 전면적 생사 확인 등을 북한과 협의·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추석을 이틀 앞둔 음력 8월13일은 국가기념일인 '이산가족의 날'로 지정됐다. 제1회 이산가족의 날은 오는 27일이다.

현충국(65) 인천지구 이북도민연합회 함경남도민회장은 “예전에는 이북5도 실향민끼리 모임을 하면 왁자지껄했는데 점점 고령화하고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며 “실향민들이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기억을 보존하는 행사나 기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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