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인천은 예부터 중국과의 교역 중심 도시다. 능허대(凌虛臺·연수구 옥련동)만 해도 인천∼중국 간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능허대는 삼국시대 중국을 오갈 때 이용하던 나루터다. 백제 근초고왕 시절 사신과 무역상 등이 출발하던 곳이다. 이들은 인천~덕적도~중국 산둥반도에 이르는 '등주항로'란 뱃길을 다녔다. 한·중카페리 최초 항로(인천~웨이하이)와 비슷한 경로를 매우 오래 전에도 이용한 셈이다. '능허대 터'는 인천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상태다.

능허대 이후 오랫동안 끊겼던 인천∼중국 해상 교역은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꿈틀거렸다. 인천∼상하이를 오가는 국제정기선이 운항하기 시작했다. 청국 상하이초상국(上海招商局)은 1883년 '난성(南陞)'호를 매달 1~2차례 상하이~인천을 정기적으로 다니게끔 허용했다. 이듬해 10월 운항을 중단했던 이 배는 1888년 3월 재개되는 등 인천~중국 항로의 생기는 넘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1949년 이래 인천∼중국 항로는 완전히 막혔다. 어쩌다 중국을 가려고 하면 홍콩항을 거쳐야 했다. 그렇게 단절됐던 한-중 뱃길이 회복한 때는 1990년 9월15일. 인천∼웨이하이 카페리 항로를 연결하면서다. 한·중 수교(1992년)를 맺기 2년 전 일이다. 이후 1992년부터 인천∼톈진·옌타이·칭다오 등 8개 한중카페리 항로가 추가로 개설됐다.

이런 한-중 뱃길은 순탄하게만 흐르진 않았다. 무엇보다 코로나19가 먹구름을 드리웠다. 2020년 1월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 인천∼중국 항로 카페리는 중단됐다. 그랬던 한·중 국제여객선(카페리) 승객 운송이 다시 열려 관련 업계를 들썩이게 한다. 무려 3년 7개월 만이다. 인천∼중국 항로 카페리 선사들은 이달 순차적으로 여객 운송을 재개하겠다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가장 먼저 12일 오전 연수구 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엔 칭다오발 뉴골든브릿지5호 승객 118명이 도착했다. 이 가운데 84명은 단체 관광객이고, 나머지는 일반 승객과 '보따리상'이다. 14일엔 웨이하이, 23일엔 스다오에서 떠나는 여객선이 인천항에 들어오는 등 중국 선사들은 산둥성 도시 연결 노선을 대상으로 승객 운송 준비를 마쳤다.

모처럼 인천항을 통해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 '유커(遊客)'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제 선사들이 정상화 방침을 선언한 만큼, 한·중 외교 관계 경색 등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으면 싶다. 인천시도 관련 기관과 함께 다양한 관광 상품을 개발하는 한편 승객의 안전 확보와 원활한 여객터미널 운영에 힘을 쏟았으면 한다.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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