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게 잠겼던 자물쇠 풀리고 … 다시 시민 품으로

정전 70년 지나도록 일부 미반환 상태
캠프마켓 총 4개 중 A·B·C구역 반환
인천육군조병창·애스컴시티 등 보존
3년 넘게 토양 정화 작업 중 … 출입 통제
부지 활용 과제 … 역사공원 조성 기대

1945년 9월8일 인천항으로 미군이 들어왔다. 광복을 맞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인천에 상륙한 미군 '제24군수지원사령부'는 인천항에서 경인철도로 연결된 부평구 산곡동과 부평동 일대에 터를 잡았고, 같은 달 16일 주둔지에는 '애스컴시티(ASCOM City)'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제강점기 무기공장인 '인천육군조병창'이 있던 자리였다.

미군의 상륙과 주둔은 그 이후로도 되풀이됐다. 주한미군이 공식 철수한 지 1년 만인 1950년 6월25일 전쟁이 발발했다. 인천상륙작전과 부평전투를 거쳐 미군은 부평에 근거지를 만들었고, 이듬해 '1·4 후퇴'로 밀려났던 국군과 미군이 인천을 탈환하면서 부평에는 다시 미군기지가 세워졌다.

반복됐던 상륙과 주둔은 정전을 계기로 멈췄다. 미군 주둔지는 부평 미군기지로 굳어졌다. 애스컴시티는 정전 70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가 반환되지 않은 '캠프마켓(Camp Market)'으로 남았다.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는 “부평에 군 시설들이 다수 들어서게 된 건 대규모 식민지 군사시설이었던 인천육군조병창이 조성된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현재도 도시의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캠프마켓이나 육군의 보급 부대는 그러한 연대기의 끝을 장식하는 마지막 흔적들”이라고 짚었다.

▲ 캠프마켓 미반환 구역으로 남은 'D구역' 입구에는 출입 금지를 알리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 캠프마켓 미반환 구역으로 남은 'D구역' 입구에는 출입 금지를 알리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정전협정 이후 고착화한 전쟁유적”

지난 8일 찾아간 캠프마켓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철제 담장이었다. 야구장 시설이 남은 운동장을 제외하면 토양 정화 작업으로 출입이 통제된 상태였다. 경원대로와 마주한 담장이 허물어지며 일반인이 드나드는 길이 열린 건 그나마 진전이었다.

캠프마켓 소통 공간인 '오늘&내일'에서 만난 김창해(71) 해설사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출입 자체가 불가능했던 공간”이라며 “캠프마켓 개방 이후 학생들도 많이 온다. 그냥 미군 부대인줄로만 알았는데 역사 현장을 보면서 아픈 기억이 담긴 땅임을 체감하고 돌아간다”고 말했다.

44만5921㎡ 면적인 캠프마켓은 애스컴시티라는 이름으로 모여 있던 7개 부대 가운데 하나였다. 전쟁 과정에서 미군 수중으로 들어간 애스컴시티는 정전 이후 군사시설로 공고해졌다. 1973년 5월 애스컴시티가 공식 해체하기까지 '캠프'로 시작하는 그 부대들은 북쪽으로 한국지엠 부평공장에서 남쪽으로 백운역 인근 부평서중학교까지 뻗어 있었다. 서쪽에선 제3보급단 부근부터 동쪽은 부평시장역과 가까운 부평동초등학교 주변까지 걸쳐 있었다.

인천시는 지난해 12월 완료한 '캠프마켓 아카이브 구축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통해 “정부 수립 이후 미군 철수로 애스컴시티 부지는 한국 정부에 귀속됐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다시 유엔 연합군이 주둔했고 정전협정 이후에도 공간 대부분이 미군의 영역으로 고착화됐다”며 “인천육군조병창, 애스컴시티, 캠프마켓으로 이어져 온 공간은 그동안의 고립으로 인해 가치가 그대로 보존된 전쟁유적”이라고 설명했다.

 

▲“사령관 명에 의해 출입을 금한다”

캠프마켓 동쪽 부원중학교 옆으로는 경인선과 연결하며 보급 통로로 쓰였던 철길이 인도를 대신한다. 철길을 따라 걷다 보면 굳게 닫힌 문이 나타난다. 여전히 반환되지 않은 캠프마켓 'D구역' 출입문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문에는 한글과 영어로 '사령관 명에 의해 출입을 금한다'고 알리는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 고립된 섬처럼 남은 캠프마켓 서쪽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 사이로 도시 숲이 위치한다. 드넓은 벌판은 야구장·축구장 등 생활체육 공간으로, 주택가와 가까운 부지는 공영 텃밭으로 쓰이는 '부영공원'이다.

부영공원 자리도 원래는 '캠프헤이즈(Camp Hayes)' 부대가 주둔했던 애스컴시티 일부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반공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전쟁 중 전국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됐는데 부평은 '제10수용소'로 불렸다. 부평 포로수용소에 머물렀던 1500여명 포로들은 미군기지 시설물을 정비하는 공사에 동원된 것으로 전해진다.

정전협정 체결을 앞둔 1953년 6월18일 부평 포로수용소에선 대규모 충돌도 벌어졌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 반공포로들을 기습 석방시킨 직후였다. 김 공동대표는 “부평에선 석방 조치가 시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이런 조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안 포로들이 집단적으로 탈출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 도심 한가운데에서 미군기지를 외부와 단절시킨 캠프마켓 담장 일부가 철거된 채 전시되고 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 도심 한가운데에서 미군기지를 외부와 단절시킨 캠프마켓 담장 일부가 철거된 채 전시되고 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2026년 이후 역사문화공원 조성”

2002년 3월29일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에 의해 캠프마켓 이전이 결정됐다. 1990년대 들어서며 본격화한 '부평 미군기지 되찾기' 시민운동의 결실이었다. 하지만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린 건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였다. 2019년 12월 정부가 캠프마켓 '즉시 반환'을 발표하고, 이듬해 일부 부지가 임시 개방되기 시작했다.

캠프마켓은 아직 '금단의 땅'으로 남아 있다. 총 4개 구역 가운데 온전히 시민 품으로 돌아온 땅은 미군 오수정화조 시설을 철거하고 도시재생 사업을 진행 중인 'C구역'(5921㎡)뿐이다.

독성 물질인 다이옥신 오염이 확인됐던 북측 'A구역'(10만9961㎡)과 일부가 개방된 남쪽 'B구역'(10만804㎡)에선 3년 넘게 토양 정화가 계속되고 있다. 반환 이후 오염 정화 단계인 이들 구역과 달리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가운데 부분 'D구역'(22만9235㎡)은 미반환 상태다.

캠프마켓 부지 활용도 과제로 남아 있다. 시는 내년 3월까지 '캠프마켓 기본계획(마스터플랜) 수립 용역'을 통해 역사문화공원 밑그림을 완성할 예정이다. 시 군부대이전개발과 관계자는 “정부와 주한미군이 D구역 반환 협상을 진행 중”이라며 “토양 정화 기간을 고려하면 2026년 이후 공원 조성에 착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포 비행장 탈환·서울 수복 초석된 '부평전투'

▲ 부평아트센터 광장에 세워진 '부평전투 승전 기념비'
▲ 부평아트센터 광장에 세워진 '부평전투 승전 기념비'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경인국도를 따라 서울로 향했다. 최우선 과제였던 김포 비행장 탈환을 앞두고 1950년 9월17일 교전이 벌어졌다. 일제강점기 조병창으로 시작해 군수기지로 쓰였던 '애스컴시티(ASCOM City)', 지금의 캠프마켓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이른바 '부평전투'다.

국군 해병대는 미 해병 제5연대와 석바위를 지나 부평삼거리역 인근을 일컫는 '원통이고개'에 다다랐다. 고갯길에는 소련제 탱크 6대를 앞세운 북한군 250여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북한군과 맞붙어 승리를 거둔 해병대는 시가전 끝에 부평 일대를 되찾았다. 부평전투를 마친 연합군은 애스컴시티를 거쳐 김포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부평전투 현장과 가까운 부평구 십정동 부평아트센터 광장에는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시설인 '부평전투 승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앞으로는 태극기를 중심으로 유엔 깃발과 성조기가 나란히 펄럭인다. 기념비는 “끈질기게 저항하는 적들과 하루 종일 치열하게 시가전까지 벌이며 김포 비행장 탈환과 서울 수복의 근거를 마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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