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57년 만에 북한 포격 도발
주민 터전 아수라장…장병 등 4명 사망
13년 지난 현재, 부서진 건물 그대로
곳곳 추모 공간 마련 희생자 넋 기려
섬주민 80명 외상후 장애 고위험군

NLL 남북 합의 부재 '갈등의 바다'
2차 연평해전 당시 6명 전사 비극

연평도 주민 “우리에게 평화는 곧 밥”

70년 전인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한반도를 뒤흔든 포성은 3년여 만에 멎었다. 전쟁 흐름을 뒤바꾼 상륙작전이 벌어졌던 인천은 물길을 경계로 접경도시가 됐다. 정전협정에서 중립수역으로 규정한 한강하구는 인천 앞바다를 따라 흐른다. 해안선을 두른 철책은 정전이라는 현실을 새삼 일깨운다. 21세기 들어서도 두 차례에 걸친 연평해전과 연평도 포격 등을 겪은 인천에서 전쟁과 평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다. 인천일보는 특별기획 '정전 70년, 기억을 걷다'를 일곱 차례에 걸쳐 격주마다 연재한다. 전쟁의 기억을 되짚어보며 다시금 평화를 이야기한다. 세대가 바뀌고 시간이 흘러도 역사는 인천 곳곳에 새겨져 있다. 전쟁을 겪었던 이들은 고령으로 접어들었다. 전쟁이 남긴 흔적과 목소리를 기록해야 정전 70년도 온전히 기억할 수 있다.

연평도 안보교육장. 2010년 11월29일 연평도 포격으로 인해 부서진 집 내부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때 일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려요.”

인천 옹진군 연평도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는 이명재(50)씨는 관광객들에게 안보교육장을 소개할 때면 여전히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고 한다. 설명을 하고 나면 어느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이 날 때도 있다. 북한의 기습적 포격 도발 당시 현장과 주민들이 겪었을 아픔이 자연스레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달 27일 오전 연평도 안보교육장 앞. 이곳에는 13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연평도 포격으로 부서진 벽돌집 3채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집 내부에는 북한군의 포탄과 화마로 인해 손상된 가구들이 고스란히 남았다. 바로 근처에는 제대로 폭발하지 않아 탄두만 벌어진 포탄도 있었다.

이곳에 살던 주민은 포격 이후 고향인 연평도를 등지고 육지로 떠났다. 이씨는 “당시 집주인은 학원에 다니던 딸 아이를 데리러 가려고 집을 나서던 차에 포탄이 거실로 떨어져 문밖으로 몸이 튕겨 나갔다”며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날로 다시는 연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소나무에 박혀 있는 고 서정우 하사의 모표와 누군가 가져다 놓은 백화 한 다발.

연평도 포격은 2010년 11월23일 북한군이 개머리 포대 위 122㎜ 방사포와 해안포를 연평도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사격하면서 시작됐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57년이 지난 때였다.

그날 북한이 발사한 포탄은 170여발. 포탄 중 60여발은 연평도로 향했고, 일부는 민가로 떨어져 주민 터전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당시 포격은 1953년 정전협정 이후 70년이 지난 지금도 북한이 한국 영토에 직접 포격을 가한 최초이자 유일한 사건으로 남았다.

연평도 주민들 아픔은 여전하다. 옹진군 정신건강복지센터가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주민 18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심리 검사 결과, 42.3%(80명)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고위험군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정우 소나무’ 인근에 있는 민간인 희생자 추모비. 

안보교육장을 나와 연평도 북쪽으로 오르막길을 30분쯤 올라가면 '서정우 소나무'와 '민간인 희생자 추모비'가 나온다. 당시 포격에 사망한 민간인과 군 장병은 총 4명. 서정우 하사는 휴가를 포기하고 부대로 복귀하던 중 북한군 포격으로 산화했다. 그의 독수리 모양 모표는 바로 인근 소나무에 지금까지도 박혀 있다. 소나무 앞에는 누군가 가져다 놓은 백합 한 다발이 서 하사의 넋을 위로하고 있었다.

소나무에서 50여m 떨어진 거리에는 '민간인 희생자 추모비'도 있다. 군부대 관사를 신축하던 중에 포격으로 사망한 민간인 2명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다. 그들이 숨진 현장에 세워진 추모비는 초록이 우거진 잔디밭 사이에 자리를 지켰다.

연평도 북동쪽에 위치한 망향비와 그 너머 보이는 중국 어선. 바다 위에 떠 있는 검은 점들이 모두 중국 어선이다.

▲분단으로 가로막힌 바다

민간인 희생자 추모비에서 동북쪽으로 20분쯤 더 올라가면 망향전망대와 망향비가 세워져 있다. 망향전망대에선 육안으로 북한 섬들과 육지까지 내다볼 수 있는데, 날씨가 좋으면 이곳에서 10㎞ 넘게 떨어진 해주의 시멘트 공장 연기까지 볼 수 있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공장 연기에 앞서 눈에 띈 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 조업하는 중국 어선 7척이었다. 서해5도를 따라 그어진 NLL은 해상 경계선으로 남북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서 '갈등의 바다'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 만난 연평도 주민은 “저 바다는 우리 해역인데 중국 어선들이 설치고 다닌다”며 “분단 현실로 인해 남쪽 어민이든 북쪽 어민이든 가지도 못하고 중국에 빼앗기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고 토로했다.

연평도 서남쪽으로 구불거리는 언덕을 지나 1시간쯤 걸으니 평화공원이 나타났다. 이곳에는 제2차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 있다. 정전협정 이후 NLL 인근 해역에서 남북은 세 차례에 걸쳐 서해교전으로 충돌했다. 1999년과 2009년 벌어진 제1차 연평해전과 대청해전은 사망자가 없었지만, 제2차 연평해전에선 윤영하 소령 등 장병 6명이 전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연평도 주민들은 마을 곳곳에 자리한 전쟁의 기억을 안은 채 담담하게 살아간다. NLL로부터 1.2㎞ 떨어진 섬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실감하면서도 다른 마을 못지않게 평화롭게 살기를 기원한다.

서해5도평화운동본부 상임대표로 활동하는 박태원 전 연평어촌계장은 “우리 주민에게 평화는 곧 밥”이라며 “서해5도 중에서도 연평도가 분단 현실로 인해 조업권에 강한 영향을 받는 만큼 남북 평화 분위기가 조성돼 주민 생계에 보탬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연평도=특별취재팀

/이순민·정회진·이창욱·정혜리·변성원·이나라·안지섭 기자

 


 

서해5도, 분쟁 아닌 평화수역 만들어야

연평도 평화공원에 있는 조형 추모비. 용의 치아를 본따 만들어진 이 조형물은 제1∙2차 연평해전과 연평도 포격 당시 전사한 장병들의 정신을 기리고자 만들어졌다.

'남북 분단 현실과 특수한 지리적 여건상 북한의 군사적 위협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서해5도'.

연평도 포격 직후였던 2010년 12월 제정된 '서해5도 지원 특별법'은 이와 같은 현재진행형 문장으로 시작한다. 서해5도는 인천 옹진군에 속한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소연평도와 인근 해역을 일컫는다.

인천은 경기·강원 등 다른 접경지역과 달리 지상 비무장지대(DMZ)가 아닌 서해5도와 한강하구 중립수역으로 북한과 마주한다.

서해5도에서 계속된 군사적 갈등은 정전협정에 기인한다. 1953년 정전협정에선 제2조 13항을 통해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및 우도의 도서군들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 통제하에 남겨두는 것”을 합의했다. 다만 지상과 달리 해상 군사분계선을 설정하지 않았다.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5도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이었다. 당시 남북은 “서해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해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이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에 협력을 약속했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에도 합의했다.

하지만 서해5도는 남북 관계가 요동칠 때마다 파도를 피하지 못했다. 선언문이 발표되고 불과 3년여 만인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전이 터졌다. 남북이 다시 대화 테이블에 앉았던 2018년 4월27일 '판문점 선언'에선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우발적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로 했다.

서해5도는 여전히 평화수역보다는 분쟁수역에 가깝다. 인천연구원이 지난해 10월 성인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평화·통일 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서해5도를 비롯해 북방한계선(NLL)과 맞닿은 접경지역 이미지에 대해 응답자 절반 이상인 51.8%는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지역”이라고 답했다.

남근우 인천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발간한 '서해 평화 플랫폼 구축을 위한 정책 방안' 보고서에서 “인천은 남북한 군사적 충돌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중심지로서 한반도 평화와 안보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