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손녕(蕭遜寧)은 거란 군사가 80만이라 주장하며 고려에 항복을 다그쳤다. 협상에 나선 서희(徐熙)는 소손녕과 첫 대면 방식을 놓고 기 싸움을 벌였다. 소손녕은 요(거란)가 대국이므로 서희가 뜰 아래에서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압박했다. 서희는 외교 상대에게 군주-신하의 예를 강요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섰다. 두세 번 말해도 소손녕이 받아들이지 않자. 서희는 분노를 드러내며 관사로 돌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소손녕이 마주 앉아 예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조정에는 영토를 일부 떼 주고라도 요나라와 화친하자는 세력까지 있는 터였다. 그래도 서희는 당당했고 대범했다.

소손녕은 고구려 옛 땅이 요의 것이며 고려가 침범해온 것이므로 “땅을 떼어 바치고 자신들과 통교한다면 무사하리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서희는 고구려 옛 땅은 고려의 고토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요와 고려 사이 압록강 일대를 여진이 교활하게 도둑질하여 차지하고 있으므로, 이를 정벌한 다음 요와 통교하겠다고 역제안을 내놓았다. 소손녕은 서희의 논리와 태도에 완전히 눌렸다. 7일간의 담판이 끝나자 거란군은 철군 결정을 내렸고, 서희는 낙타 10수(首), 말 100필, 양 1000두와 비단 500필을 받아 돌아왔다. 서기 993년(성종 12년)의 일이다.

서희가 전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고려의 위기를 오히려 영토 확장과 국방 강화의 기회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정확히 짚었기 때문이다. 서기 10세기에 11세기로 넘어가는 밀레니엄 전환기 동아시아는 송-거란-여진-고려의 수교와 단절, 전쟁이 복잡하게 얽히는 시간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속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거란과 통교하겠다는 명분을 주고, 강동 6주라는 실리를 챙겼다.

서희는 한민족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외교관으로 꼽힌다. 외교부가 2009년 '외교를 빛낸 인물'을 선정하기 시작하면서 첫 손에 서희를 선정했다. “서희의 외교담판은 '송(宋)과의 관계'라는 명분보다는 '평화와 영토 회복'이라는 실리를 중시한 결과로서, '창조적 실용외교'의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첫 외교부장관이었던 유명환 장관이 어느 언론에 기고한 글의 한 대목이다.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고 천 년 전과 현재의 외교를 같은 평면에서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서희 외교의 원칙과 명분, 실리의 정신은 되새겨볼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그때나 지금이나 국제정세가 급격하게 요동치는 시대다. 정파적 단견에 갇혀 '평화와 실리'라는 국익조차 아전인수 할 때가 아니다.

/양훈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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