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운명의 파도에 휩쓸린 무림 고수들

“무예가 높은들 하늘만큼 높진 않고, 자질이 두터운들 땅만큼 두텁지 않죠.”

섣달그믐, 궁이를 찾아온 엽문은 궁가 64수가 연기처럼 사라질까 봐 걱정하며 궁이에게 궁가 64수를 청한다. 그러자 궁이는 천 년 무술 역사에 연기처럼 사라진 게 한둘이냐고 반문하며 이렇게 말한다. 인생무상의 세월 속에 아쉬울 게 없다면서….

영화 '일대종사'(2013)는 량차오웨이(梁朝偉), 장쯔이(章子怡), 장첸(張震), 송혜교 주연에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이 연출한 무협액션영화이다. 영화는 이소룡의 사부인 엽문의 일대기를 철학적이고 함축적인 대사와 함께 아름다운 영상에 담아내었는데 특히 클로즈업과 슬로우모션으로 물방울 하나하나의 움직임마저 담아낸 무술신이 압권이다. 그리고 비운의 여인 궁이 역을 맡은 장쯔이의 열연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격랑의 세월 속에 놓인 무림 고수들

1936년 포산, 영춘권의 고수 엽문(량차오웨이)이 북방팔괘장 종사 궁보삼 은퇴식에서 남파의 대표자로 뽑히면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엽문은 궁보삼과의 대결에서 무공이 아닌 생각으로 겨뤄 승자가 된다. 이 승부에 불복한 궁보삼의 딸 궁이(장쯔이)는 승리를 되찾아오겠다며 엽문에게 도전장을 날린다. 엽문은 궁가 64수의 유일한 후계자인 궁이와 대결하게 되고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튼다. 후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진 두 사람은 편지로 애틋한 감정을 나눈다. 그런데 1938년 포산이 일본군에 함락되면서 두 사람의 재회는 무산된다. 엽문은 집이 일본군부에 넘어가고 극심한 생활고에 빠진다. 대일 항전 시기 8년 동안 돈도, 벗들도, 두 딸도 잃은 엽문은 가장 넘기 힘든 높은 산이 생활임을 깨닫는다. 영화는 격랑의 세월 속에 놓인 인물들을 조명한다. 이들은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운명 속에서 승자가 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엽문이 힘든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궁이에겐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아버지 궁보삼이 수제자 마삼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복수하지 말라고 남긴 아버지의 유언과 어르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궁이는 복수를 결심한다. 궁이는 복수를 위해 평생 결혼도 못 하고 무공 전수도 못 하고 후사도 못 보는 맹세를 한다. 그리곤 1940년 섣달그믐 밤 기차역에서 마삼과 한 판 붙는다. 이 대결에서 이긴 궁이는 심한 내상을 입어 이후 아편중독자가 되고 만다. 1953년 궁이는 결국 아편중독으로 인해 사망한다. 무공에선 패한 적이 없는 궁이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선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1949년 전쟁이 끝난 후 엽문은 홍콩으로 와서 영춘권 도장을 열고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다. 1952년 홍콩으로 건너온 팔극권의 고수 일선천(장첸)이 백장미 이발소를 열고 제자를 받기 시작하면서 팔극권이 홍콩에 전해지게 된다. 1953년 중공정부가 홍콩-광둥성 국경을 폐쇄하는 바람에 엽문은 더는 고향 포산으로 가지 못하고, 아내와 아들과도 헤어져 홀로 홍콩에 남게 된다.

이 영화는 여러 버전이 있는데 한국에서 개봉한 버전은 122분짜리 국제판이다. 영화의 완성도 면에서 봤을 때 130분짜리 중국판이 제일 괜찮다는 평이 우세하다. 영화에서 편집은 제2의 창작이라고들 한다. 영화 '무극'도 중국판과 국제판 버전으로 나뉘는데 중국판은 걸작이지만 국제판은 망작에 가깝다. 국제판은 상업성 위주로 편집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난 오리지널 버전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시희(SIHI) 영화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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