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여주시 점동면과 강천면은 경기도의 동쪽 도계를 이룬다. 점동면에서 남쪽으로 가면 충청북도 충주이고, 강천 동쪽으로 향하면 강원도 원주 땅으로 넘어간다. 남한강은 점동면 삼합리에서 섬강과 청미천을 받아들인다. 말 그대로 삼합(三合)이다. 점동면 흔암리 선사시대 유적지는 현재로부터(Before Present) 약 3200년 전 청동기 사람들의 터전이었다. 그곳에서 1970년 불에 탄 볍씨(탄화미)와 무문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어 한국 선사시대 연구에 획기적인 도움을 주었다. 점동면 남한강변은 아득한 옛날부터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흔암리 옆이 도리인데, 남한강 황포돛배가 다니던 시절에 도리의 되래 마을은 배가 정박하던 시설이 있는 요충지였다. 게다가 흔암리 흔바위 마을에서 도리 되래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육지 교통에도 중요했다. '아홉사리'라 불리던 이 길은 넓지 않는 오솔길이었으나 충주로 가는 중요 통행로였다. <여주군지>에 따르면 되래 동쪽 산자락은 절벽과 남한강의 운치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절경이었고, 신선바위의 경치는 남한강변의 명소 중에서도 손꼽히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찾는 이 없어 안타깝게 방치된 상태라고 한다.

흔암리와 도리에서 남한강을 건너면 강천면 굴암리와 강천리다. 굴암리와 강천리 앞 강변에는 강천섬이라는 하중도(河中島)가 있다. 강천섬은 본래 물이 많이 차지 않을 때는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강변 습지였으나, 남한강 물길이 바뀌면서 진짜 섬이 되었다. 강천섬은 남한강 섬 가운데서도 규모가 크다. 양평의 양섬보다 넓다. 강천섬은 몇 년 전부터 캠핑하기 좋은 명소로 입소문이 퍼졌다. 굴암리나 강천리에서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탁 트인 경치가 펼쳐진다. 봄이면 목련, 가을이면 은행나무 길이 일품이다. 멸종위기종인 단양쑥부쟁이 군락지도 강천섬에 있다. 여주시는 최근 강천섬 숙박 캠핑을 금지하고 대신 힐링센터를 세우는 등 휴식 명소로 가꾸기 위해 힘쓰는 중이다.

문제는, 미군 헬기가 5년 전부터 강천리와 도리 일대에서 무도한 훈련비행을 강행한다는 것이다. 헬기가 마을 상공을 저공비행으로 낮게 날아다니고, 야간에는 집에다 서치라이트를 비추기까지 한다니 지금이 1960년대인가 싶다. 여주시가 훈련일정이라도 미리 통보해 달라고 요청해도 아무런 대꾸가 없다니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다. '되래' 마을의 지명유래담을 보면 임진왜란 등 나라의 환란이 있어도 안전한 마을이어서 되래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동맹군이 그 아름다운 명맥을 심각하게 뒤흔드는 처사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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