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에 벌어진 제3차 중동전쟁은 개전 6일만에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을 점거한 후 끝났다.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과 항구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조건으로 점령지를 반환하겠다고 비밀리에 제의했으나 당사국인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를 거부했다. 제3차 중동전 당시 조선일보 국제부에 근무하던 필자는 뉴스와 해설기사를 쓰면서 냉전시대의 대표적인 화약고였던 중동 사태를 우려하면서 중동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로부터 6년 후 이집트와 시리아군은 유태인들의 속죄일이며 휴일인 욤 키푸르에 기습작전을 감행했다. 1973년 10월6일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필자는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으로 프랑스에서 전황을 취합하여 본사로 송고하고 있었다. 이라크, 요르단, 모로코, 리비아, 사우디까지 지원군을 보냈고 이스라엘군인 대부분은 휴가를 떠나서 아랍 연합군의 동시다발적 기습으로 방어선이 붕괴되는 위기에 처했다. 자칫하다가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듯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본사에 현지로 가서 취재하겠다고 자청(自請)하니 위험하고 취재 비용도 만만치 않다면 난색을 표했다.
▶이스라엘군이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하면서 전황이 한치 앞을 전망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파리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을 찾아가 입국사증(비자)을 신청하면서 항공편을 물었더니 일반 항공편은 전면 결항이지만 종군기자로 원한다면 생명보장 없는 조건으로 이스라엘 예비군이 타고 갈 응급 항공편에 좌석을 마련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며칠 후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에 파리 공항을 출발하는 이스라엘 항공편에 예비군들과 함께 기내 조명을 끈 채 긴장된 4시간의 비행 끝에 텔아비브 공항에 기적적으로 안착했다.
▶프레스센터에는 이미 세계각국에서 온 700여명의 종군기자들이 최전방에 나가 취재하기 위한 물밑 경쟁을 치열하게 벌리고 있었다. 다행히 1969년도 이스라엘 정부 초청 때 알게 된 공보실 간부가 프레스센터의 고위직을 맡고 있어 최전방 전선에 나갈 수 있는 풀기자로 선정되는 기적 같은 기회가 있었다. 수에즈 운하를 건너간 이스라엘군과 함께 사나이 반도의 치열했던 전쟁터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고 포로가 된 이집트 군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 그리고 모세 다얀 국방장관을 전선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소련제 샘6 미사일을 직접 보고 촬영할 수도 있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회상해보면 본사에서 정식 허가가 나지 않은 취재를 위해 스스로 현장으로 간 적이 4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1969년 헬싱키에서 열린 미국과 소련간의 전략무기제한(SALT) 회담이었고 두 번째는 1970년 칠레의 사회당 후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세 번째는 한국기자 최초로 1973년 소련입국 그리고 네 번째가 4차 중동전이었다. 어제가 욤 키푸르 4차 중동전 50주년이었다.
/신용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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