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인천은 언론 분야에서도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8·15 광복 직후 1945년 10월7일 우리말로 이뤄진 대중일보 창간을 필두로 다양한 신문들이 선을 보였다. 인천 개항(1883년) 후 한동안 일본인 시각에서 만든 신문은 있었지만, 우리글로 된 지역지는 없었다. 그래서 인천의 정체성을 반영한 대중일보 창간 의미는 더욱 컸다.

대중일보는 창간사에서 “사회정의를 옹호하고, 오직 불편부당(不偏不黨)이란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을 독자에게 공약한다”라고 선언했다. 그런 대중일보 정신을 이어받아 인천일보가 1988년 7월15일 창간됐다. 신군부가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가, 언론 자율화 이후 전국 처음으로 발행한 지방신문이었다. 인천 언론의 지향점을 대중일보와 공유했다.

대중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고일(高逸·1903~1975)은 인천의 대표적 언론인이다. 그의 본명은 희선(羲璇), 호는 산재(汕哉)다. 인천이란 지역 정서와 가치를 신문에 잘 반영한 일로 유명하다. 그는 1954년 4월 '주간 인천'에 '인천석금(仁川昔今-인천의 어제와 오늘)'이란 칼럼을 연재했다. 개항 초기부터 50년대까지 인천 사회상을 1년여간 실은 글에서 “나는 인천의 아들, 인천은 나를 키우고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며 지역에 대한 애정을 쏟았다. '인천석금'은 향토 이야기 책 중 '원조'격이다. 시대적 배경과 무대가 근·현대에 걸쳐 있다. 1955년 초판 발행 후 1979년 한 출판사에서 재판본을 찍어냈으나, 희귀본으로 남아 책을 찾는 이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다가 2001년 해반문화사랑회에서 젊은 세대에 낯선 문장을 바꿔 교정본을 발행했다.

고일은 언론계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노동·문화·체육 등 많은 분야 인사와 두루 교류했다. 그는 이렇게 수두룩한 영역에서 인천의 지식층을 이끌던 진정한 의미의 '오피니언 리더'로 꼽힌다. 1915년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고일은 이듬해 곽상훈 중심으로 결성된 '경인기차통학생회' 친목회 문예부에서 활동했다. 여기서 우현 고유섭과 이길용 기자(동아일보 일장기 말살 사건 주역) 등과 함께 잡지를 내기도 했다. 아울러 곽상훈과 국내 최초의 야구단인 한용단을 창단하고, 독립만세운동에도 참가했다.

고일의 육필 원고가 공개됐다. 인천시립박물관의 <매일매일 인천 기록:고일 미공개 아카이브> 전시(8월30∼11월13일)에서다. 박물관측은 그가 꼼꼼히 모은 기억과 기록에 새롭게 주목했다. “기자의 자랑은 정의의 사도이며, 시대의 경고자와 역사의 추진자로서 자부하는 데 있다.”라고 밝힌 고일의 기자정신은 오늘에도 유효하지 싶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