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석의 지구촌./인천일보DB

1974년 스위스의 베른에서는 국제 사격연맹(ISSF) 총회가 열렸다. 1978년에 개최되는 42회 세계 사격선수권 대회의 개최지를 결정하는 총회에는 124개국 대표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조선일보 프랑스 특파원으로 있던 필자는 우리나라 군의 사격수준을 높이기 위해 ISSF 선수권대회를 유치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대한체육회로부터 유치 가능성을 타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사격대회를 유치하기 위해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득표 활동을 벌이고 있던 나라는 멕시코였다. 1968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멕시코는 유력한 체육인이자 부호인 바스케스 라나가 앞장서서 유치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필자는 유럽은 물론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70여개국을 찾으며 사격연맹 대표들을 만나보면서 유치 가능성을 타진하며 득표 활동을 시작했다. 멕시코는 의외의 강적이었지만 한 번 해볼만한 경쟁으로 판단되었고 결과는 대한민국의 승리였다.

▶세계 사격대회 유치와 개최를 통해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들과 각국의 체육지도자들을 광범위하게 알게 된 연유로 1981년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으로 근무하던 필자는 정부의 공식적인 요청에 따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올림픽 총회에 유치단의 핵심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다. 투표권을 가진 IOC 위원들과의 친분으로 20여일간에 걸친 바덴-바덴에서의 활동은 긴장과 극적인 장면의 연속이었고 강적이었던 일본의 나고야를 52:27로 누르는 기적을 실현시켰다.

▶세 번째 국제 대회 유치는 2002년 FIFA 월드컵이었다. 88 서울올림픽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대한민국은 올림픽과 쌍벽을 이루는 월드컵 대회를 일본과의 공동개최라는 절묘한 타협안을 통해 성공시킬 수 있었다. 필자의 네 번째 국제대회 유치는 17회 아시안 게임이었다. 2004년 당시 안상수 시장으로부터 유치위원장으로 위촉된 필자는 뉴델리라는 힘든 경쟁도시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부담이 된다는 정부의 노골적인 비판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유치에 성공했으나 유치는 안상수 준비는 송영길 개막은 유정복 시장이 맡는 과정에서 필자가 끝까지 반대했던 주경기장 신축은 지금도 춘추의 한으로 남아 있다.

▶40여년간에 걸쳐 대형 국제 스포츠 대회 유치에 참여하고 앞장서 오면서 겪었던 소회는 2030년 엑스포 유치에 뛰어든 부산의 파장공세에 놀라움을 느낀다. BIE(국제박람회기구) 회원 170국의 투표로 결정되는 개최권 획득을 위해 정부는 외교부, 산업부, 해수부가 전면에 나서고 10대 재벌 대표들이 회원국을 방문하거나 초청하며 유치 지원 민간 위원회를 발족시켜 총공세를 펴고 있다. 그 동안 크고 작은 유치 경쟁을 벌이며 부산에 뒤졌던 인천으로서는 앞으로 300만 도시의 위상에 걸맞는 유치 능력과 지원 세력 확보에 총력을 다 했으면 한다.

▲ 신용석 언론인.<br>
▲ 신용석 언론인.

/신용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