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적 8인중 1명 윤덕영
말년 보낸 구리 민가에 방치

친일파 몰락·말로 기억장소
학계 “역사·교육의장 활용을”
▲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의 '윤집궐중(允執厥中)' 휘호비가 구리 아차산 입구 민가 수돗가에 방치돼 빨래판 구실을 하고 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푸이가 친일파 윤덕영에게 내린 '윤집궐중(允執厥中)' 휘호비가 구리시 교문동 아차산 입구 민가에 방치돼 보존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윤덕영은 경술국적 8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숙부로, 그는 일제로부터 한일병합조약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아 호의호식하다 1940년에 생을 마쳤다.

환갑을 앞둔 윤덕영은 말년을 보내기 위해 1932년 5월 구리면 교문리 381 일대 3필지 약 4만평을 사 2300평 규모의 별서(별장)를 짓고 등용동(登龍洞)이라 명명했다. 별장의 안채는 강루정(降樓亭), 사랑채는 갑탁정(甲坼亭)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그는 말년에는 이곳에서 손님을 맞거나, 교문리 일대에 살던 아이들을 데려와 공부를 시키는 등 한때는 여러 가지 자선 활동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변에는 서고와 서당, 돌로 만든 분수대, 작은 연못, 우물, 해시계인 일영탑 등이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거의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푸이에게 받은 '윤집궐중(允執厥中)' 휘호비와 해시계 일영탑 받침대로 쓰인 일영대 등 몇 개의 석물만 남아있다.

별서의 건물은 해방 후 친일 자본가가 뜯어 갔고, 1971년 그의 묘소 이장과 개발로 원형의 모습은 사라졌다. 이후 구리농원이라는 식당으로 바뀌었고, 회갑연과 야외예식 등의 장소로 이용되다 지금은 민가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푸이의 휘호비는 빨래판으로 사용될 법하게 수돗가에 뉘어져 있으며, 일영탑 받침돌로 쓰여진 일영대는 살림집 귀퉁이에 방치돼 마모 과정을 거치고 있다. 별장을 상징하는 등용동 입비(立碑)도 살림집 앞으로 이동했다.

별서는 구리시청 바로 옆 아차산 산책로 입구에 있으나 구리문화원의 일부 연구자와 역사학자 외에는 무관심이다.

한철수 시인·구지옛생활연구소장은 “이 별서는 대한제국 멸망을 주도했던 친일파 윤덕영과 힘없이 나라를 내주었던 푸이의 흔적이 남아있는 역사적 장소”라며 “역사는 아름다운 것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폐허에 남아있는 석물이라도 구리시에서 챙겼으면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일부 역사학계에서도 “비록 친일파 건물 잔해라고 해도 흔적과 자취를 수습해 친일파의 몰락과 말로를 보여주는 역사교육의 학습장으로 활용되어야 한다”며 같은 목소리를 냈다.

/구리=글·사진 신소형 기자 ssh283@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