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바람 내몰린 '이주민촌'
함봉산 자락 마지막 달동네

1997년 봄 벽화마을 새물결
단출했던 삶 '제가끔의 울림'
그해 12월 거리의 미술 탄생

IMF 풍랑, 새집의꿈 물거품
2002 희망색칠 다시 기지개
TV 드라마·영화 촬영 배경

2022년 십정2 주거환경 개선
벽화·우물 작품 단지내 조성

오래도록 참 아픈 곳이었다. 이 늙은 마을에선 그만큼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았다. 삶 속에서 끝없는 얘깃거리가 피어올랐다.

아침에는 아침의 사연이, 저녁에는 저녁의 곡절이 그득했다. 이야기 속에는 가난과 슬픔이 있었다. 희망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 마을 사람들은 가르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살면서 배웠다. 그들에게 그곳이 바로 세상이었고 삶의 속살이었다.

▲ 함봉산 끝자락 야산에 자리잡은 '이주민촌' 열무물마을 모습.

인천시 부평구 열무물마을 '신덕촌(십정동 216일대)' 부평의 마지막 달동네 신덕촌은 시작부터 비루했다. '이주민촌'이라는 딱지가 따라붙었다.

함봉산 끄트머리 신덕촌은 야산에 공동묘지가 있던 옴팡진 땅이었다. 오갈 데 없는 이들에게 선덕촌은 그나마 애절한 안식처였다.

1964년 선인재단의 미추홀구 도화동 인천대학교 조성으로 내몰린 가냘픈 생애, 1967년 서구 율도 인천화력발전소에 밀려난 앙상한 삶, 1969년 주안국가산업단지 조성으로 내쫓긴 앙상한 인생, 1972년 미추홀구 수봉산 공원과 현충탑 건립으로 밀려난 쓸쓸한 생명의 이주 물결이 선덕촌에 일었다.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버텨 가던 서글픈 군상들은 찬바람이 이는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집터를 잡았다. 평생 숨돌릴 틈 없이 아등바등 살아온 목숨은 말뚝을 박고 새끼줄을 꼬아 담을 쳤다. 주안염전에서 소금 꽃을 피웠던 신덕촌의 염부들은 곯은 배를 부여잡고 흙벽돌로 집을 세웠다.

고단하고 주름졌던 이주민의 달동네 삶은 살수록 조금씩 풀리고 펴졌다.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소리가 동구 밖까지 넘쳤다. 달동네 언저리에 상정초등학교(1989년 개교)와 하정초등학교(1991년 개교)가 생겼다.

신덕촌의 인정(人情)에는 빛깔이 돌고, 향기가 배어 있었다. 단출한 삶이었지만 볼품없지 않았다. 검박했지만 남루하지 않았다.

1997년 봄, 신덕촌에 새 물결이 일었다. '열우물 벽화마을.' 힘들고 메마른 삶끼리 더듬어 보자는 제가끔의 울림이었다. '벽화를 모색하던 몇 사람'은 해님공부방 담벼락에 그림을 담자고 제안했다. 시멘트벽에서 열무물의 밤 풍경이 튀어나왔다. 언덕배기 계단에서 푸른빛과 흰빛이 돋아났다. 물비누 풍선을 부는 아이가 전봇대 속에 들어섰다. 첫 벽화를 모습을 드러낸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은 그해 12월, 공동체를 위한 공공미술 그룹인 '거리의미술'까지 생겼다.

매끄러울 것 같았던 '벽화그리기'는 풍랑을 만났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었다. 열우물 사람들은 허리띠를 다시 졸라매야 했다. 아침에 출근했던 주안산업단지 안 공장이 저녁때면 사라졌다. 부지기수의 실업자로 얼마 크지 않았던 상권마저 흔들렸다.

▲ 인천시 부평구 열무물마을 '신덕촌(십정동 216일대)' 전경.<br>
▲ 인천시 부평구 열무물마을 '신덕촌(십정동 216일대)' 전경.

'새집'의 희망도 감쪽같이 사그라들었다. 1997년 지정된 주거환경개선지구가 IMF 구제금융 여파로 1997년 해제됐다. LH(당시 대한주택공사)가 인천에는 미분양 아파트도 남아돌고 열우물동네는 개발해도 수익성이 없다며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포기한 것이다.

세도 안 나가는 낡은 판잣집, 빈 소주병을 수북이 싸놓은 채 문을 닫은 하꼬방, 찬바람이 휑하니 휩쓰는 골목길…, 열우물 사람들의 낯빛도 어두워져 갔다.

열우물동네에는 파란색 지붕의 집들이 도드라지게 많다. 2000년 초반 비가 새고 벽에 금이 간 집에서 버텨 왔던 주민들이 개발이 지연되자 어쩔 수 없이 지붕만 수리한 까닭이었다.

햇볕조차 들지 않는 집, 가진 것이라곤 몸뚱어리가 전부인 사람들, 살수록 풀리기는커녕 더 쪼그라드는 곳, 열우물의 사람들은 기지개를 다시 켰다. 2002년 벽화를 통해 희망을 색칠하는 열우물길 프로젝트를 재계했다. 2016년까지 100여 곳이 넘는 곳에 벽화가 그려졌다. 열우물벽화마을은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도 비쳤다.

▲ 십정2구역 전경.
▲ 십정2구역 전경.

2022년 5월 신덕촌은 십정2구역(19만2402㎡)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다시 태어났다. 인천도시공사(iH)가 그곳에 지하 2층~ 지상 49층의 28개 동의 아파트 단지로 조성해 5678세대(토지 소유자 1550·공공지원민간임대주택 3578·영구임대 300·공공임대 250)의 입주를 시작했다.

iH는 새것들을 이식한 십정2구역에서 옛것의 소중함이 콘크리트에 매몰될 것을 우려했다. 그 공간에서 자족하고 더불어 아늑하기를 바랐다. 빛깔이 있고 향기가 있는 터전, 십정 폴리(folly·도시속에 문화적 특성을 가지는 소규모 공공시설물이나 장식용 조형물)였다.

없어진 열우물동네의 벽화와 우물, 계단, 골목 풍경, 석재 문설주, 전봇대 등 과거의 생활유산을 버리지 않았다.

재건축 현장에서 수집한 벽돌과 서양 양식의 창문 몰딩을 변형하고 재조합한 작품(We are Where We are Not-Window)을 단지 안에 세웠다. 없어진 주택과 공간에 대한 흔적을 상상하고 추억하자는 뜻에서였다.

스테인 리스 스틸과 우레탄 도장으로는 'Time'이라는 작품을 세워 희망과 즐거운 시간을 꿈꾸도록 했다. 시멘트 통신주로는 작품 'Modern Totem-Wish Bird'를, 역시 스테인리스 스틸로는 작품 '하늘 우물', 타일로는 'Inspire', 수집된 우물로는 'Endless Wisdom' 등의 작품을 단지 안에 만들어 뒀다.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더께와 깊이를 녹여냈다. 늙음의 형식 속에서 새로움의 내용을 빚어낸 것이다.

/박정환 기자 hi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