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훈도 논설위원.
▲ 양훈도 논설위원.

실학은 원래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럴싸하지만 속은 텅 빈 공리공담(허학)에 맞서는, '알차고 쓸고 있는 학문'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다. 이를테면 조선시대 정통 유학자 입장에서 보자면 성리학이야 말로 실학이고, 나머지는 허학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국학파는 조선 중·후기 현실개혁적인 학풍을 추구한 일련의 학자를, 실학파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경우 성리학이 허학이 된다. 이제 실학은 이들의 학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경기도 민선도지사들은 '경기실학'을 주목했다. 민선시대를 맞아 계승해야 할 경기도의 정체성 가운데 실학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실학의 비조로 꼽히는 반계 유형원, 실학의 거두 성호 이익, 실학을 집대성했다고까지 일컬어지는 다산 정약용이 경기도 출신이거나 연고가 있었다. 민선 3기 손학규 지사에 이르러 실학을 주제로 한 축제가 구상되고 실현된다. <실학축전 2004 경기>다.

역사교육 덕분에 조선시대 실학의 핵심정신인 실사구시, 이용후생, 경세치용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무슨 뜻이고 오늘날 우리의 삶과는 어떤 관계인가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실학축전 담당자들은 역사 속 실학을 체험으로 되살릴 방도를 깊이 고민했다.

<실학축전 2004 경기>는 실학이 박제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미래의 대안이라고 역설한 '에코실용박람회', 남성 중심 유교철학 전통에 가려진 여성 실학자들을 찾아 생활 속 실학을 모색한 '축제로 만나는 규합총서', 220년 만에 복원·부활시킨 전통연희 '산대희' 공연을 선보였다. 관람객의 호응이 상당히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듬해 <실학축전 2005 경기>에서는 『열하일기』의 여정을 당나귀 타고 돌아보도록 꾸민 '연암마당', 다산의 삶과 철학을 마당극으로 꾸민 '다산선생과의 하루'도 공연되었다.

경기도 실학현양사업의 큰 매듭인 실학박물관(2009년 개관)이 올해 봄에 준비했다는 프로그램을 살펴보다가 문득 이 시대의 실학은 뭘까라는 뚱딴지같은 의문이 들었다. 요즘 들어, 조선시대 실학은 현실개혁을 추구하기는 했어도 성리학 질서에 근본적으로 도전하지는 않은 학풍이라는 박한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성리학자들이 쳐다보지도 않은 분야를 깊이 파고든 실학자들의 관점과 자세는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실학자 가운데는 서얼이 적지 않았다 해서, 실학이 사회적 소수자(마이너리티)의 학문이라고 하는 건 비약이 분명하다. 그래도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하층 백성들의 실제 삶에 주목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사구시, 이용후생, 경세치용이 이 시대 약자들에게 무슨 의미일까?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인가? 실학이 실학이기 위해 거듭 던져져야 하는 질문이다.

/양훈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