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문일 논설위원.

자유공원에 오르면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기념탑'이 보인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 감리교 아펜젤라 목사 부부와 장로교 언더우드 목사 등 4명이 제물포항을 통해 들어와 이 땅에 첫 개신교 역사를 펼친 일을 기려 세웠다. 기독교인들의 소망을 모아 1986년 3월30일 제막식을 거행했다.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항에 도착한 후 기도한 내용은 지금도 회자된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주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이들 선교사는 복음 불모지였던 조선 땅에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학교와 병원을 세워 한국사회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기억된다. 이들은 성서 번역사업과 청년운동 등을 통해 전도와 민족 계몽에 앞장섰다.

인천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항(1883년) 이후 인천을 통해 한국 선교를 위한 개척자들이 속속 내한해서다. 이들은 곧바로 인천에서부터 선교활동을 벌이며 교회를 세웠다. 결국 인천이 개신교의 최초 발상지인 셈이다. 국내 첫 감리교회(내리교회)가 생긴 곳도 인천으로, 내리교회는 '어머니 교회'로 불리기도 한다. 1892년 내리교회 존스 목사 부부는 인천에 영화여학당을 설립한 뒤 학생 수 증가에 따라 1911년 동구 창영동에 벽돌식 건물을 새로 지었다. 한국 최초의 사립 초등학교이자 서구식 교육기관의 기원으로 알려진 영화초등학교의 출발이다.

이처럼 한국 교회의 성장과 발전 과정엔 인천이 존재한다. '최초의 기억'과 함께 수많은 선교사의 열정과 헌신이 읽힌다. 이를 반영해 인천엔 세계 성경과 관련 역사 자료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도 있어 눈길을 끈다. 국제성서박물관(미추홀구)이 대표적이다. 여기선 성경에 관한 각종 국내외 문헌·유물 등은 물론 한국 교회 신도들의 신앙생활 흔적 등을 엿볼 수 있다. 국제성서박물관은 1995년 4월30일 주안감리교회에서 개관했다. 중세시대 양피지 성경부터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인쇄기와 종교개혁과 관련된 다양한 성경, 한국어 번역 초기 성경 등 무려 5000여점의 기독교 유물을 소장한다.

종교를 떠나 국내 첫 기독교 문물 도입은 인천의 위상을 드높인다. '기독교 복음의 관문' 인천에 우뚝 들어선 기념물이 색을 바래지 않도록 힘을 쏟는 일은 시민 모두의 몫이다. 그런가 하면 한국교회가 인천 제물포항 인근 선교 유적을 보존하고, 선교사들의 '개척 노정'을 새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세상이 변함에 따라 역사도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종교는 바뀌지 않은 채 무한한 힘을 내뿜는다. 종교는 세계 역사와 문화 발전 속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인류와 늘 함께한 종교가 앞으로도 계속 세상을 밝히는 '등불'로 자리하길 기대한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