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문일 논설위원.

한 사회의 구성원이 함께 겪은 역사적 사건을 공유하는 기억. '집단기억'(集團記憶)의 사전적 정의다. 개인이 겪은 기억들의 조각이 집단의 그것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제도·관습·문화 등을 만들어간다. 때론 편의에 따라 왜곡되기도 하는데, 아무튼 모든 일은 개인을 넘어 집단기억이란 되새김질을 하기 마련이다. 그럼으로써 갖가지 역사가 탄생하고, 우리는 이를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인다.

우리 근·현대사를 잠깐 거슬러 올라가 보자. 세세하게 밝히려면 정말 많지만, 아주 굵직한 문제를 추려 떠올릴 때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과 일제의 식민 지배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여기엔 뿌리 깊은 집단기억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근·현대사를 일거에 확 뒤바꿔 놓을 만큼 엄청난 일이었다. 개인에게도 씻을 수 없는 비애로 남지만, 나라 전체적으론 실로 경천동지할 사태였다. 아직도 그 기억은 현재진행형이다. 남북한은 여전히 대치 중이고, 일본은 식민지 지배와 관련된 상당 부분을 없애거나 왜곡시킨다.

이처럼 집단기억과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다. 기억이 사회적인 기능을 하는 반면 역사는 일종의 추상적인 변화를 나열할 뿐이라곤 해도, 이 둘의 관계는 특별하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역사는 완전히 분리할 수 없어 더욱 그렇다. 상호보완하는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집단기억은 특정 상황에서 역사와 같다는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때론 역사를 바로 세우는 담론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사이에서 선택은 오로지 국민 몫일지도 모른다. 그런 인식 아래 숱한 인천에 대한 기억 중 '한 장면'을 상기한다. 시민들의 가슴을 송두리째 무너지게 한 '인현동 화재 참사'다. 1999년 10월30일 불법영업 중이던 중구 인현동의 한 상가에서 불이 나 학생 52명을 포함해 57명이 숨지고 80여명이 다친 끔찍한 사건이다. 참사 당시 창문과 비상구는 20대 관리인이 “돈을 내고 가라”며 잠가 막혀 있었다. 뇌물수수 등으로 공무원 40명이 입건됐다. 부정부패와 탐욕이 어우러진, 우리 사회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낸 참사였다.

인현동 사고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 20여년 만에 공공기록집으로 되살아났다. 홍예문(門)문화연구소가 최근 출간한 책자다. '인천미래기억채집:1999 인현동 화재 참사 기록'에선 유족·구급대원·교사·소방관 등 30여명이 인터뷰에 참여했다. 머리말에 쓰인 대로 “20년 동안의 기록이 아닌 20년 만의 첫 기록”이다. 인천시·인천시교육청·시민사회가 20년 넘게 집단기억을 왜 망각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기억채집을 펴낸 일은 청소년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는 데 있다. 참사 발생이 마치 아이들의 잘못으로만 비쳐지는 데 대해 어른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생각하기 싫어도 반드시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내일의 잣대로 삼자는 뜻이리라.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