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영 경제부장.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새벽 5시30분까지 강남 빌딩으로 출근해야 합니다. 태어날 때 이름은 있었지만,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이다. 한 달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잠들기 전 낙이 있다. 유튜브를 통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한나절 논일, 밭일, 소 키우기를 마친 3형제가 동네 곳곳에서 하는 20분 남짓 먹방을 넋 놓고 바라보는 거다. 그날 밤 잠자리에도 어김없이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구동했다. 가장 먼저 추천된 영상은 '노회찬의 6411번 버스 연설'이었다. 어떤 연유로 알고리즘이 이 영상에까지 나를 인도했는지 알 수 없다. 10년 전 당 대표 수락 연설이다. 위트로 시작된 그의 연설은 쉽게 지나치는 사회 부조리를 날카롭게 꼬집었고, 마지막은 낮은 곳으로 임해야 하는 진보정당의 과제를 언급했다.

7분여 영상을 멍하게 봤다. 그리고 이를 소개하던 한 정치학자가 '보고 싶다. 사랑한다'를 뱉은 후 어깨를 들썩이며 무너질 때 나도 무너졌다. 머쓱해 유튜브 알고리즘을 탓했지만, 은연중 정의롭지도 따뜻하지도 못한 엉망진창 내 삶이 한탄스러워 그랬으리라.

가만히 귀 기울이면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꼼꼼히 살피면 사각에 있는 그들을 찾을 수 있다. 매일 똑같이 보고 듣는 것으로는 약자요, 소수이며, 불평등에 상처 입은 헐거운 이웃을 살필 수 없다.

스웨덴 족벌 기업 발렌시아의 신조는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Esse, Non Videri.)'이다. 군림하지만 티 나지 않게 한 세기 넘게 혈족 기업의 맥을 잇고 있다.

바이오부터 비행기 엔진까지 그야말로 문어발식 경영을 펼치는 이 회사는 한국의 여느 재벌들과 다르다. 부끄럽지 않은 혈족 승계와 이익 환원, 노·사 경영권 나눔에 인색하지 않다.

요즘 주주총회가 한창이다. 이맘때면 지난해 가족경영으로 수 백억원의 연봉을 거뒀고, 천문학적 주식배당을 받았다는 대기업 소식을 심심찮게 접한다. 그리고 족벌 경영의 폐해로 곤두박질친 주가 문제도 살필 수 있다.

'존재하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한국의 민낯과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 스웨덴 재벌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또 존재만으로 사회적 논란거리를 일으키는 몇몇 한국 재벌과는 아예 하늘과 땅 차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존재하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그들로 넘쳐 난다.

한 달 전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그리고 두 달 후면 지방선거다. 늘 그렇듯 국민의 선택은 옳았고, 시민의 결정은 정당할 거다. 치열했고, 치열할 것이기에 오는 지방선거의 예측은 무의미하다. 선거 컨벤션 효과를 기대하는 후보가 있다면 무모할 거다.

투표는 후보가 걸었던 흔적에 기댄다.

오른쪽, 왼쪽, 파란색, 빨간색 위에 후보 삶의 궤적을 놓고 평가한다. 거기에 후보가 쌓아 올린 수많은 행위의 나이테가 변수로 작동한다. 삶의 궤적과 행위의 나이테가 뭉쳐 후보라는 존재가 돼 국민의 혹은 시민의 선택을 받게 된다. 1948년 이후 약 40년간 대한민국 투표는 왜곡됐다.

제대로 된 참정권은 1987년 이후 지금껏 약 35년밖에는 작동되지 못했다. 우린 후보는 알지만, 그 후보를 느낄 수 없던 과거를 끊어냈다. 그렇게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됐다.

시침이 가고 분침이 흐르면 5년이란 시간도 4년이란 세월도 지난다. 투표로 선출됐거나 선출될 위정자들은 이 시간 선택할 수 있다.

존재하되 존재를 느낄 수 없는 국민 모두에 눈을 맞출 수 있는 자가 될 것인지, 아님 존재 자체로 국민에게 근심거리가 될 한국의 몇몇 재벌의 모습을 보일지 말이다. 퇴임 후 임기 중 걸었던 존재의 궤적과 나이테가 죽을 때까지 위정자에게 꼬리표로 따라 붙을거다.

/이주영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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