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훈도 논설위원

경기도의 꽃 소식은 남쪽에서만 올라오지 않는다. 서쪽 바다 풍도에서도 들려온다. 이맘때 안산 풍도는 1년 중 가장 주목을 받는다. 3~4월 후망산 비탈에서 진귀한 야생화들이 무리지어 피어난다. 풍도에서만 볼 수 있다는 풍도바람꽃과 풍도대극이 압권이다.

바람꽃을 서양말로는 아네모네라 한다. 꽃의 여신 플로라의 시녀였으나, 플로라의 남편 제피로스(서풍)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플로라의 질투로 꽃이 되었다는 신화가 따라다닌다. 막장드라마 감인데, 왠지 짠하다.

온화한 서쪽 바람이 만지듯 지나가면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을 보고 상상해 낸 '치정극'이리라. 아네모네의 꽃말이 '사랑의 괴로움'이다. 막장드라마는 욕하면서 본다지만, 바람꽃 종류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좋아서 욕을 떠올릴 겨를이 없다.

풍도바람꽃은 변산바람꽃의 아종이라 여겨지다가, 꽃잎이 더 크고 모양이 다르다는 점이 밝혀져 풍도바람꽃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얻었다. 풍도라는 섬 이름도 풍파를 겪었다. 풍성할 풍(豊)자를 쓰다가 2021년 봄에야 단풍나무 풍(楓)자 본디 이름을 되찾았다. 이름을 잃었던 시점은 청일전쟁 직후 갑오개혁 때였다. 전쟁에서 이긴 일본의 입김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서해의 작은 섬 풍도는 2000년대 들어 경기도의 야생화 천국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유명해졌으나, 그 전에는 청일전쟁의 불길이 댕겨진 곳으로 역사에 이름이 남은 곳이었다. 당시 외세의 힘을 빌려 동학농민군을 제압하려는 집권세력들 때문에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와 있었다. 아산만으로 들어온 청나라 북양군은 바닷길로 보급을 받고 있었는데, 일본군은 이 해로를 차단해 버릴 계획을 세웠다. 1894년 7월 25일 새벽 공식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 해군을 공격하는 풍도해전이 시작되었고, 한반도는 전쟁터가 되었다.

풍도서만 볼 수 있는 또 다른 야생화 풍도대극은 색깔의 변화가 놀랍다. 꽃봉오리가 맺힐 무렵까지 자주색이었다가 꽃이 벌어지면서 점차 연두색으로, 녹색으로 변한다. 붉은 단풍나무의 역순이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찍은 사진을 들여다볼수록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조화가 신비하다. 바람꽃 신화에 빗대면, 서쪽 바람이 어루만져 생명의 색이 피어났을 터이다,

아마도 갑오년(1894년) 봄에도 풍도바람꽃과 풍도대극이 후망산 기슭에 피어났을 터이고, 전쟁 다음해인 을미년(1895년) 봄에도 서풍은 야생화들을 깨웠을 터이다. 역병은 여전히 심술궂고, 미사일은 날라 다니지만, 여전히 곱게 피었을 풍도 야생화가 보고 싶은 2022년 임인년 봄이다.

/양훈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