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3월1일 당일에 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은 경기도에서 경성과 수원 두 곳 뿐이다. 수원은 북문 앞 용두각(방화수류정)에 군중이 모였는데, 경찰이 해산시키자 흩어지는 척하다가 만세를 불렀고, 만세 소리를 듣고 군중이 더 많이 모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경기도 소속이었던 개성에서는 3월3일 호수돈여학교와 송도고보 학생 시위가, 인천에서는 3월6일 창영학교 시위가 만세운동의 시작이다,

어디가 먼저냐는 전혀 중요치 않다. 만세운동의 성격상, 각성한 백성이 주도적으로 준비하여 자발적 만세시위를 확산시켜 나간 과정이 백배 천배 의미 깊기 때문이다. 경기도 만세시위는 3월20일까지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예컨대 3월7일 사흥, 3월10일 양평, 3월11일 평택 안성, 3월14일 양주 가평…… 이런 식이다. 이 시기를 파상국면이라 한다.(박환·최재성, <한 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만세시위는 3월23일 무렵부터 급증한다. 그 날 고양 6건, 시흥 6건, 수원 1건, 김포 3건으로 집계된다. 3월26일에는 고양 4건, 파주 4건, 광주 3건, 장단 2건, 부천 시흥 수원 김포 양주 각 1건이다. 만세운동의 절정국면으로 분류되는 3월28일부터 4월8일 사이에는 거의 모든 군에서 시위가 빈발했고, 주재소 습격과 방화, 순사와 보조원 처단이 여러 지역에서 이뤄지게 된다. 4월 중순부터 일제 헌병과 군대의 악랄한 보복이 진행되었다.

지역 3·1운동이 서울보다 늦어진 이유를 당시의 열악한 교통·통신 수단 탓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영향이 없지 않았겠으나, 백성들의 자발적 의지가 모이고, 가혹한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가 자연스럽게 터져 나올 시간이 필요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읽고 자진해 해산한 이른바 민족대표들은 만세운동의 이후 전개 과정을 어느 정도나 짐작하고 있었을까?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 기미년 백성들의 분노를 사망자가 속출했던 당시의 팬데믹 '스페인 독감'으로 연결 짓는 최근의 설명은 아직 입증되지 않은 미숙한 가설에 불과해 보인다.

기미년 봄 만세시위 물결은 한반도의 전근대성을 완전히 끝장냈다. 독립 후 어떤 정치체제여야 하는가를 놓고 이전까지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했다. 다시 왕정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복벽주의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봄 이후 한반도의 정치적 의사는 근대 '민주공화국'으로 수렴되었다. 지난 103년, 우리는 민주적으로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공화주의적으로 공화를 추구해왔을까? 기미년 봄의 목숨 건 함성들을 좁은 프레임 안에 가둔 건 아닐까? 생각이 많아지는 20대 대통령선거일 아침이다.

/양훈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