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들어 한파가 다시 매섭다. 올 겨울, 삼한사온까지는 아니더라도 강추위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듯하다. 어깨를 웅크리고 길을 걷다가 문득 지난주 신문에 실렸던 연천 고대산 역고드름이 생각났다.

2009년 무렵 연천 신서면 신탄리역으로 답사를 갔다가 고대산 역고드름 얘기를 처음 들었다. 2005년께 한 주민이 신탄리역에서 머잖은 경원선 폐터널에서 고드름이 솟아오르듯 자라는 신비한 현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마침 겨울 초입이어서 그 신기한 현상을 구경하겠노라, 칼바람 부는 논둑길을 한참 걸었던 기억이 난다.

아쉽게도 때가 일러 역고드름을 제대로 보지는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역고드름은 어른 손가락 마디 크기로 시작해서 2월이면 초등학교 저학년 키높이까지 자라기도 한단다. 양초처럼, 죽순처럼, 원기둥처럼 자란 역고드름과 천장에 원추형으로 매달린 크고 작은 고드름이 아래위로 어울리는 장관은 나중에 사진으로 만족해야 했다.

분단과 전쟁이 아니었다면 고대산 역고드름은 생기지 않았을 현상이다. 식민지 시절 말기에 시작된 경의선 복선공사가 해방으로 중단되었다. 38선이 그어지면서 경원선 열차 운행도 끊겼다. 당시 북한 땅이었던 신서면 고대산 터널은 전쟁 시기 인민군 탄약고로 쓰였다. 미군은 터널 일대를 맹폭했다.

폭격으로 금이 간 터널 천장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은 영하 20도 이하로 내려가는 터널의 지표면에서 얼어붙었다. 이들 물방울은 얼어가는 동시에 따뜻한 땅 밑 물방울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물이 떨어지면서 얼고, 천천히 끌어올려져 얼어가니 서서히 자라 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 원리는 다르지만, 전북 진안 마이산 은수사 역고드름도 유명하다. 추운 겨울 본당 근처에 정화수 담은 대접을 놓아두고 자면 다음날 아침 중력을 거스르듯 거꾸로 솟아오른 얼음 줄기를 볼 수 있다. 불자들은 얼음으로 현현한 불체(佛體)라고 믿는다 한다.

지난 50여년 세월동안 기적소리 끊긴 접경지역 폐터널 안에서 역고드름이 자라는 현상이 보는 이도 없이 겨울마다 되풀이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시조시인이 고드름을 일러 '원추형 거꾸로 선 꿈'이라 했다.(고성만 시조 '고드름') 비유를 확장하면 고대산 역고드름은 바로 선 평화의 꿈 아닐까. 우리 시대엔 역발상이 꿈을 바로 세우는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다.

사족 : 역고드름은 관두고 고드름을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처마가 사라진 도시에서는 고드름을 볼 일이 거의 없다. 고층아파트에 달린 고드름은 흉기로 여겨진다. 한겨울 시린 아침 창문을 열면 제법 굵은 고드름이 주렁주렁하던 시절이 그립다. 내일이 대한이다.

 

/양훈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