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러 나라엔 중국인들이 한데 모여 생활하는 곳이 많다. 이른바 '차이나타운'이다. 여기서 화교(華僑)들은 나름대로 상권을 형성해 대를 이어 장사를 한다. 특유의 상술을 펴며 지역경제를 쥐락펴락하기도 한다. 오늘날 중국이 초강국으로 성장한 데엔 이들 화교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19세기 각국으로 돈을 벌러 이주한 뒤 부를 쌓은 화교들의 파급 효과가 엄청나다는 의미로 들린다.

인천에도 차이나타운이 있어 성업을 이룬다. 중구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를 본거지로 둔 차이나타운은 처음엔 '청관(淸館)' 거리로 불렸다. 구한말 조선인들이 청국 조계(租界·일종의 치외법권 지역-1884년 11월 설정)를 통칭하던 말이었는데, 1912년 조계를 폐지하고 난 뒤에도 한동안 계속 사용했다. 당시 청국 지계를 중심으로 동순태(同順泰)·인합동(仁合東)·동화창(東和昌) 등 청국 거상들이 운영하는 점포들이 늘어섰다고 전해진다.

차이나타운에선 뭐니뭐니 해도 중국음식점이 손으로 꼽힌다. 인천에선 국내 최초로 짜장면을 선보여 유명한 공화춘(1905년 개업)을 비롯해 중화루와 동흥루 등이 요리 맛을 내세워 사람들의 발길을 잡았다. 이 가운데 중화루의 명성은 서울에까지 퍼져 경성인들의 입맛을 자극했다. 베이징에서 건너온 일급 주방장이 내놓는 정통 요리를 맛보려고 경향 각지의 미식가들이 몰려들었다. 중화루는 공화춘의 성업을 눈여겨 본 화교 유지들이 돈을 모아 차렸다고 한다. 이들은 우리나라 첫 호텔로 알려진 '대불호텔'이 문을 닫자, 이를 사들여 1915년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중화루는 해방 이후에도 잘 나갔다. 1949년 자료를 보면, 인천엔 화교가 경영한 중화요리점과 음식점이 69곳에 달했다. 한국전쟁 중 잠시 문을 닫기도 했지만 1960∼70년대에도 그런대로 장사는 쏠쏠했다. 그러다가 한국 화교의 미주 이민 증가, 정부의 영업 제한 조치 등으로 1970년대 말 화교 경영 중화요리점은 전국에서 30% 정도만 남았고, 중화루도 이 시기 폐업했다고 알려졌다.

인천시립박물관이 지난 주 <중화루의 얼굴-간판> 자료집을 발간해 눈길을 끈다. 이 간판은 인천의 근대 중국요리점이었던 중화루의 내·외벽에 걸었던 '상징'에 다름 아니다. 임술년 중춘(壬戌仲春)인 1922년 음력 2월에 제작됐다. 올해로 꼭 100년의 역사를 맞는다. 1978년 건물이 철거되기까지 중화루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시립박물관은 현재 중화루 간판 8점을 소장하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이처럼 갖가지 중국 음식 역사를 간직한다. 옛 공화춘 자리에 문을 연 '짜장면박물관'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 중국음식점들은 인천의 근대사와 사회상을 담아내고 있다. 인천 역사의 변화상을 알 수 있는 각종 문건과 기록 등이 더 나오길 기대한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