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창수

영화 '대장 김창수'의 영문 제목은 'MAN OF WILL'이다. 영화는 '의지의 사내' 청년 김창수가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인 사형수로 옥살이하면서 인천감리서에서 겪거나 벌인 일들을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그려낸다.

영화에서는 경인선 철로 부설 노역으로 대체됐지만, 김창수는 수형생활동안 축항(築港) 노역에 동원됐다. 썰물밀물의 해수면 차이가 10m로 큰 인천항을 배가 닿기 좋게 항구를 구축하는 공사인 축항 노역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백범일지>에 “이전에 있던 서대문 감옥 생활은 '누워서 팥떡 먹기'였고 매일 무거운 흙지게를 등에 지고 10여 장의 높은 사다리를 오르내리면 반나절 만에 어깨가 붓고 동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돼서 여러 번 떨어져 죽을 결심을 할 정도였지만 같이 쇠사슬을 마주 맨 동료들까지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 일을 했다”고 밝힐 정도였다.

 

#김구 선생 동상

영화 속 김창수의 사형집행일.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보내준 새하얀 바지저고리를 갈아입은 김창수는 사형집행 직전, 고종의 특별사면 전보로 극적으로 생명을 건진다.

감옥에 있는 동안 못 배우고, 못 가졌다는 이유로 재판조차 받지 못한 채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조선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소장을 대신 써주며 '대장'이 된 청년 김창수는 탈옥을 감행하고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로 다시 태어난다.

인천 중구는 청년 김창수가 수감됐던 감리서가 있던 곳이다. 또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광복 후 돌아온 백범 김구가 1946년 지방순회 때 처음 찾은 곳이 감리서 터 주변 인천 내리교회다. 중구는 이런 인연을 되살린다며 신포동 문화의 거리 로터리부터 성신아파트 앞까지 200m 구간을 '청년 김구 역사거리'로 만들었다. 2019년부터 구의 역점사업으로 추진하면서 로터리를 300㎡ 규모의 광장으로 조성하고 김구 선생 동상을 세웠다.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트리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41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성령원에 장식을 했다는 기록이 크리스마스 트리의 첫 기록이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크리스마스에 트리를 세우고 촛불로 장식하면서 기독교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그 이후 전 세계로 퍼졌다는 설도 유력하다.

지금은 해마다 성탄절을 앞두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드는 것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크리스마스 풍습이다. 교회나 성당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한다. 각 지방자치단체도 거리 곳곳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워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고 새해를 맞는다.

인천 중구는 지난 11월28일 백범 김구 선생 동상으로부터 열 걸음 남짓한 거리에 3층 건물 높이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점등식을 가졌다. 홍인성 중구청장은 이날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맞아 관광객과 시민들이 즐거움을 함께하며 행복한 추억을 담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중구의 계획대로라면 해를 넘겨 내년 1월31일까지 김구 선생 동상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

 

#두 달 넘게 마주 보기

“구속된 몸으로 징역 공사한 곳이 축항 공사장이었다. 그 항구를 바라보니 나의 피와 땀이 젖은 듯하고,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했다.”(<백범일지> 부분)

김구 선생 동상의 건립 장소에 대한 역사적 고증이나 예술성 논란은 접어두고라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왜 그곳에 세웠는지는 궁금하다. 해마다 세웠던 곳이기 때문이라면 내년 이맘때도 또 그 이후에도 김구 선생 동상과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편한 마주 보기'는 되풀이될 게 뻔하니 말문을 닫는 게 낫겠다.

그래도 한마디 거든다면 중구청장이 바쁘다면 관계자라도 김구 선생 동상 옆에 서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바라보기를 바란다.

청년 김창수가 겪은 '축항 노역'은 탈옥으로 모면했지만, 김구 선생 동상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해마다 두 달 넘게 마주 봐야 하는 '불편한 시선'을 거두게 할 방안이 있을까 해서다.

/여승철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