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개항 후 인천엔 외국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유형의 문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가운데엔 인천에서 성황을 누린 연극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인천에서 처음 막을 올린 연극으론 1912년 초 임성구의 혁신단(革新團) 일행이 축항사(협률사 후신)에서 벌인 신파극 '육혈포 강도(六穴砲 强盜)'를 꼽는다. 협률사는 처음엔 남사당패의 풍물놀이·인형극·창 등을 공연하다가 1910대 들어 신파연극을 올린 곳으로 유명하다. 협률사는 극장 이름을 축항사(築港舍)로 바꿨다가 1915년 다시 애관(愛館)으로 개칭했다고 전해진다.

축항사에서 애관으로 연결되는 인천의 상설 연극무대는 1926년 '칠면구락부'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칠면구락부는 창단과 함께 춘향전·카르멘·사랑과 죽음·눈물의 빛 등을 애관에서 공연했다. 이들은 단순히 공연을 선보이는 데 그치지 않고 연극에 대한 연구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볼거리가 마땅치 않던 당시 이들 공연은 대중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인천의 연극은 광복 후엔 서울에 밀려나 빛을 보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걸었다. 여기에 한국전쟁으로 혼란을 겪은데 이어 1957년쯤부터 시작한 방송극 등으로 인천은 '연극의 불모지'로 전락했다. 일단 공연할 장소를 찾지 못할 정도로 열악했다. 연극을 펼치고 싶어도 공간이 별로 없어 애를 먹는 상황은 난감하기만 했다. 개항 후 연극의 꽃을 피웠던 시절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인천의 연극인들은 “두고 볼 수만 없다”며 각성을 하기 시작했다. 돌체소극장·경동예술극장·미추홀예술극장·신포아트홀·배다리예술극장 등이 개관한 때는 그 무렵이었다. 싸리재를 중심으로 일대에 소극장 전성시대를 맞았다. 이들 공연장을 전후해 배출한 작가와 배우도 상당수에 이른다. 하긴 인천에선 이런 연극 무대와 상관 없이 일찌감치 내노라하는 배우가 많이 나와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인천시도 연극 필요성에 공감을 하고 지원에 나섰다. 1992년엔 인천문화회관 소극장이 새로 단장을 했고, 이듬해엔 인천문화예술회관이 완공돼 연극인들의 숙원을 풀었다. 지금은 시립극단을 비롯해 숱한 민간 극단이 연극 준비에 정성을 기울이며 시민들에게 다가선다.

인천일보가 인천문화재단과 공동으로 인천의 연극 명맥을 지켜온 극단 9곳을 차례로 조명했다. 각각 인천 연극계에 남긴 족적을 소개하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었다. 연극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감흥을 살피기도 했다. 영화와 드라마와 같이 연극도 인생의 희로애락을 그리는 장르라는 점에서, 이 기획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인천 연극사를 촘촘하게 엮어 어떻게 하면 과거의 영화를 오늘에 되살릴지도 떠올리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