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인천 연수구 인천대학교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고(故) 최기선 석좌교수(전 인천시장) 흉상 제막식을 마치고 (왼쪽부터) 장남 최강수씨, 차남 최강국씨가 아버지 흉상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이재민 기자 leejm@incheonilbo.com
24일 인천 연수구 인천대학교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고(故) 최기선 석좌교수(전 인천시장) 흉상 제막식을 마치고 (왼쪽부터) 장남 최강수씨, 차남 최강국씨가 아버지 흉상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이재민 기자 leejm@incheonilbo.com

흉상(胸像)은 인체의 상반신을 조각으로 나타낸 미술 작품으로 머리에서 어깨와 가슴 부분을 표현한 두상(頭像)도 넓은 의미에서의 흉상에 포함된다. 보통은 정치인이나 예술가 등 한 분야에서 역사적 또는 국가나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한 사람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 사후에 특정장소에 세운다.

지난 24일 인천대학교 송도캠퍼스 컨벤션센터에서 고 최기선 전 인천시장의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최기선 전 시장이 1993~1994년 '선인학원 사태' 당시 사학 인천대를 시립대학으로 전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공로를 기리기 위한 자리였다. 인천대는 시립대학을 거쳐 2013년 국립대로 발돋움했다.

선인학원은 육군 중장 출신의 백인엽씨가 1958년 사립학교 성광학원을 인수한 뒤 1965년 교명을 '선인'으로 바꿨다. 선인의 '선'자는 백씨의 친형이며 육군 대장 출신의 백선엽씨의 가운데 이름 '선'자와 자신의 '인'자를 따서 지었다.

선인학원 출범 후 당시 인천 남구 도화동 일대에 유치원부터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10여개의 사립학교를 거느리는 '국내 최대 사학재단'이 됐다. 군사정권 시절, 장성출신의 백인엽·백선엽 형제가 군부 고위관계자와 친분을 활용하면서 '학교 늘리기'가 가능했다.

70, 80년대 인천에서는 '한 집에 한 명은 선인재단의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많은 학생이 아침에 등교하다 보니 경인전철 제물포역 뒤쪽의 선인학원 정문부터 학교별로 수십명씩 두 줄로 맞춰 각 학교까지 군대에서 행군하듯 걸어갔다.

권력의 힘을 배경으로 커진 '거대 사학' 선인학원은 부정입학, 횡령, 교직원 부정채용 등 비리와 방만 경영으로 '부실 사학'으로 몰락하면서 학내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최 전 시장은 1994년 3월4일 제7대 관선시장으로 취임한 뒤 '선인학원 사태' 해결에 나서 백인엽 측근들의 격렬한 반대와 교육부·내무부 등 관료의 우려를 설득시켜 1994년 3월 인천대를 비롯한 대학 두 곳과 12개의 중고등학교 등 선인학원 시립화를 이끌어냈다.

당시 최 시장과 함께 인천대 시립화에 많은 역할을 담당했던 '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시민의 모임' 사무국장 이진 목사는 인천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민정부 들어 마지막 관선 시장으로 최 시장이 오지 않았다면 인천대 시립화가 늦춰졌거나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최 시장은 “인천시민과 인천시가 힘을 합쳐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었다”며 '선인학원 혁명'의 공을 시민에게 돌렸다.

2018년 2월28일 타계한 지 3년여만에 흉상으로 시민들 곁으로 돌아온 최기선 전 시장을 보며 인천대 시립화의 의미를 되새겨보면 어떨까?

여승철 논설실장
여승철 논설실장

/여승철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