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 22세 때 인천감옥에서 사형을 받았다가 23세 때 탈옥·도주하였고, 41세때 17년 징역을 언도받고 인천감옥으로 들어가니 말 없는 감옥도 나를 아는 듯, 내가 있던 자리는 옛날 그대로 나를 맞아주었다.”

“구속된 몸으로 징역 공사한 곳이 축항 공사장이었다. 그 항구를 바라보니 나의 피와 땀이 젖은 듯하고,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했다.”

김구 선생이 인천의 기억을 적은 백범일지 중 한 부분이다.

우리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와 인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국모 민비 시해사건과 관련된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한 일로 인천감리서에 수감됐을 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한살 이었다.

인천항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미결수의 신분으로 인천감옥을 탈옥한 후로부터 17년이 지난 1914년 재수감 된 것도 인천감옥이었다.

그리고 인천축항 공사장에서 고난의 노역 생활을 했다. 강제노역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그는 일지에 혹심한 회술을 했다.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매고 공사장으로 출역을 간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10여길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린다. 불과 반 일 만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된다. 바다에 떨어져 죽고 싶지만 같이 쇠사슬을 맨 죄수들도 함께 떨어질 것이므로 참고 또 참았다.”

그에게 인천은 가히 형극의 땅이었다.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은 직후 1946년 38선 이남의 지방을 순시하던 그가 첫 목적지로 정한 곳 역시 인천이었다. 지옥 같은 고통으로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기도하던 곳, 청년 김창수를 백범 김구로 치열하게 단련시킨 곳이었기 때문일 테다.

최근 인천 중구 신포동에 김구 선생의 동상이 여기저기 세워졌다.

중구가 자체사업으로 추진한 '청년 김구 역사거리·탐방로' 조성에서 비롯됐다.

구는 중구 신포문화의거리 로터리와 성신아파트 앞 200m 일대 전체를 김구 선생과 관련된 주제로 꾸며 인천 수감생활과 탈옥, 노역의 역사 등을 반추하려 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8개 주제로 각기 다른 김구 관련 동상을 세웠다.

동상은 김구 선생의 풍채와 신장 등을 최대한 실제와 가깝게 금속으로 표현했다. 형태를 빚어서 주형을 만들고 그 안에 쇳물을 부어 완성한 주물 작품이다.

전통복식의 두루마기를 입은 그는 뒷짐을 진 태도다. 그의 시그니처 같은 동그란 안경테에 이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밝게 웃고 있다. 신포동 곳곳에 서 있는 그의 표정은 이렇게 동일하다. 감리서 터에 서서도, 노역 현장을 바라보면서도 그렇다.

중구는 동상의 모습에 대해 김구를 친근하게 표현하려는 의도였다고 밝혔다. 누구나 가깝게 여길 수 있는 친구 같은 이미지 즉 '김구 프렌들리'를 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나라의 자주적 독립을 위해 그가 인천에서 겪어야만 했던 투쟁의 역사와 고결한 희생을 잘 아는 이라면 동상의 천진한 모습이 이질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한밤에 대형 스포츠 매장을 뒤로 한 채 커다랗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괴이하기까지 하다.

비장이 끊어질 고통과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뼈아픈 배신,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 현장에서 너무나도 명랑한 그의 모습이 극단의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조형물로나마 아무 걱정 없고 평온한 그를 마주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나 문제는 의식의 흐름이 생략됐다는 데 있다.

동상 김구가 강제노역과 투옥의 과거를 딛고 어떤 고민을 거쳐 신포동에 우뚝 서게 된 건지 동상 속 종국의 외형이 이런 식인 배경은 무엇인지 설명하고 공감을 구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보다 김구가 왜 친근해야 하는지부터 풀어야 했다.

중요한 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할 수 없듯, 민족의 정신과 얼 또한 침략당할 수 없음을 몸소 살아낸 그의 열망을 이해하고 특히 인천사람으로서 공유할 그의 유산을 느끼는 일이다.

중구는 이런 역사의 무게와 진짜로 우리가 그의 형상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이 뭔지를 간과한 건 아닌가 싶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격의 없는 정치'라는 유행을 진보적 가치로 착각하고 김구에도 대입해 '친근의 우(愚)'에 빠진 건 아닐까 한다.

 

 

/장지혜 문화체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