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전 현상한 필름들.

책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현상된 필름을 발견했다. 전등에 비춰보았지만 네거티브 필름이라 얼굴들이 까맣게 보였다. '여기는 어디고 이들은 누구지?' 불현듯 사진으로 인화해서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검색해보니 사진을 뽑을 수 있는 낯익은 상호가 떴다. 중구 사동 정우현상소. 아직도 있구나. 70년대 중반부터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반가운 사진 현상소다. 현상소 안의 풍경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필름을 맡겼다. 3×5 사이즈 사진 한 장당 300원.

낡은 필름 덕분에 잠시 필카(필름카메라) 시절의 공간이 소환되었다. 80년대 초 동인천 옛 인영극장 뒤쪽에 '후사코상사'라는 간판을 단 필름 도매상이 있었다. 특이한 이름 때문에 아직도 기억한다. '후지' '사쿠라' '코닥' 앞글자로 당시 그 가게에서 많이 팔리는 필름 순서로 만든 가게 이름이었다, 길 건너 대한서림 뒤에 지금도 대를 이어서 운영하는 사진계의 노포(老鋪) 성신카메라가 있다. 컬러 사진이 선보이기 시작한 1970년 문을 열어 가게 문턱이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 하루에 필름 1000 롤을 팔았다. 내친김에 집 한 채 값과 맘먹는 돈으로 자동현상기 한 대를 들여놨다. 보통 하루에 200롤 이상의 사진을 뽑아냈다. 1970년대 초반 사진 한 장 현상하는데 100원이었다. 당시 짜장면값이 80원이었다. 1롤(사진 24장) 현상하면 짜장면 30그릇 팔았다고 좋아했던 호시절이다. 당시 인천 중심가에는 정우현상소를 비롯해 성신카메라, 제일카메라, 현대카메라, 김씨카메라 등이 있었다. 개그맨 이혁재의 부친도 '축현사' 라는 간판을 걸고 동인천에서 DP(사진현상)점을 운영했다.

그날 정우현상소에 필름을 맡길 때 두 시간이면 나온다고 했지만 그냥 일주일 후에 찾기로 했다. 사진을 손에 쥘 때까지 왠지 그 필름 속에 존재했던 물상을 상상하고 싶었다. 일주일 후 지금은 사라진 공간들과 내 곁을 떠난 이들을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