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철 논설실장
여승철 논설실장

다큐멘터리 영화 '노회찬 6411'이 나왔다.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동지들의 '노동자 노회찬' 회고로 시작하는 영화는 20대 때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한 뒤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 설립을 주도하고 현실정치의 벽에 맞서는 '정치인 노회찬'의 모습과 2018년 7월23일 삶을 마감하기까지 '인간 노회찬'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알려진 대로 인천과 노회찬의 인연은 '인천5·3민주항쟁', 인민노련, 평생의 동지이자 영원한 동반자인 아내 김지선씨와 결혼스토리 등으로 각별하다.

1973년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며 민주화운동에 첫발을 디딘 노회찬은 고려대학교 입학 후 5·18 민주화운동을 겪은 뒤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가 1982년 영등포직업학교에서 딴 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가지고 용접공으로 노동현장에 뛰어든 곳은 인천이다.

인천에서 주로 활동하던 노회찬은 1987년 6월항쟁의 시발점이 됐던 1986년 '인천5·3민주항쟁'을 주도하는데, 훗날 그는 “인천민주항쟁을 1980년 5월18일 이후 처음 만들어진 해방공간”이라고 회상했다.

인천의 노회찬은 부천지역 활동가들과 함께 1987년 인민노련을 결성한다. 당시 인민노련은 정회원만 600명이 넘은 전국에서 제일 큰 노동자조직이었다. 노동자 정당 설립과 백기완 민중당 대선후보 선거운동에 앞장선 노회찬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뒤 2012년에는 서울 노원병, 2016년 경남 창원 성산을 지역구에서 당선되며 3선의원으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노회찬은 3선의원이었지만 17대에는 민주노동당 탈당, 19대는 '떡값 검사' 명단을 공개한 '삼성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 상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20대까지 임기를 제대로 마친 적이 없어 의정생활은 7년 남짓에 불과하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집니다. 불판을 갈 때가 왔습니다”, “거꾸로 타는 보일러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복지 공약이 왜 이렇게 거꾸로 축소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라는 노회찬이 남긴 명언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육천사백십일번 버스라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정의당 대표 수락 연설과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여러분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정의당에 대한 애정을 담은 마지막 글까지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노회찬. 그가 지금 있다면 2년째 코로나19로 시름하는 국민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던질지 새삼 궁금해지는 가을이다.

 

/여승철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