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일하며 자식들 뒷바라지…어머니 그립습니다
▲ 고 성애순씨는 요양병원에서도 늘 온화한 모습으로 자식들에게 “남들에게 베풀면서 살아라”고 당부했다. /사진 제공=김경호씨

“돌아가신 어머님은 어렵고 험난한 세월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였습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지만, 자식들은 원하는 만큼 가르쳐야겠다는 일념으로 헌신적인 뒷바라지에 일생을 바치셨지요. 이웃들에게는 정이 많으셔서 없는 살림이지만 나눠주기를 마다하지 않던 분이셨어요.”

고 성애순(1933년 6월 1일~2021년 7월 11일)씨는 전남 곡성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옆 동네 살던 김재하씨를 중매로 만나 결혼을 하고, 6·25전쟁 때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을 따라 인천 부평에 정착했다. 젊어서부터 어묵공장이나 솜틀공장에 다니거나 시장에서 야채행상, 생선장사 등 고단한 삶이었지만 아끼고 모으는 생활 습관은 평생 철칙으로 삼았다.

고인의 3남1녀중 막내아들인 김경호 연수김안과 상무이사는 “아버지가 목수 일을 하셨지만 벌이는 넉넉하지 않았어요. 저희가 집을 장만하거나 자식들이 대학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의 희생 덕분”이라며 회상했다.

김 이사는 15년 전 어머니를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태운 휠체어를 밀며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와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 됐네요. 아이처럼 너무 좋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가까운 곳이라도 자주 모시고 다녔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네요.”

고인은 2011년에 뇌동맥류 수술을 받았다.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해지고 치매도 찾아와 요양병원에 모시게 됐다. 다행히 병세가 호전되고 매일 찾아오는 자식들을 모두 알아보는 '착한 치매'라 평온한 생활을 하신 덕에 정이 듬뿍 묻어나는 온화한 모습은 항상 그대로였다.

“지난 7월10일 병원에서 갑자기 어머니가 호흡곤란을 보이니 응급실로 모시라는 연락이 왔어요. 급성심근경색 진단에 수술과 함께 콩팥 기능도 떨어져 혈액투석까지 받았지만 끝내 소생하지 못하시고 가족과 영원한 이별을 했지요. 다행인 것은 대전국립현충원에 잠들어계신 아버님 옆에 나란히 모실 수 있어 자식들로서는 마음이 한결 편하게 됐다는 점이지요.”

/여승철 기자 yeopo99@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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