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구간 옛 역명 관련 오류 바로잡아야


모가 기관차 종착역 'CHEMULPO'
개항장으로 아는 외국인 이용객 다수
행정구역명 인천 대신 제물포로 표기

독립신문 '杻峴'을 유현으로 기재하나
1955년 7월, 동인천으로 역명 바꾸며
관보에 전 역명으로 한글 축현 병기돼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첫 기적을 울리게 된 배경과 그 발전 과정을 보면서 인천이 이 나라 철도의 시발지였던 것은 이제 누구나 아는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경인선과 관련해 논란이 되거나 혼란스러운 부분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번에는 경인선과 관련하여 아직도 논란이 되는 몇 가지 쟁점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특히 경인선 정차역의 인천구간 역명이 그렇다.

▲ 'SEOUL-CHEMULPO'로 경인철도의 시종착역이 표기된 모가형 증기기관차.
▲ 'SEOUL-CHEMULPO'로 경인철도의 시종착역이 표기된 모가형 증기기관차.

▲역명(驛名), 왜 '인천' 아니라 '제물포'였나

한반도에서 맨 처음 달린 기차는 모가(Mogul)라는 이름의 탱크형 증기기관차였다. 탱크형이란 연료와 물을 싣는 탄수차를 따로 연결하지 않고 기관차에 자체적으로 싣고 다니는 방식을 말한다. 당시 경성에서 인천까지는 전 구간이라고 해야 45㎞가 채 안 되는 단거리 구간이었기 때문에 그에 맞는 경량급 동력차가 선정됐다. 그런데 초창기 모가의 사진 중에는 측면에 'S. &. C. R. R.'이라는 영문약자와 'SEOUL-CHEMULPO'라는 글씨가 씌어있는 것이 발견된다. 실제로 이 차량이 얼마나 운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문약자는 경인철도 운영사인 경인철도합자회사(Seoul & Chemulpo Rail Road)를 뜻하며, 'SEOUL-CHEMULPO'라는 것은 당시의 경성역과 인천역이라고 하는 경인철도의 시종착역을 표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조선의 500년 도읍이었던 서울을 부르던 이름은 여러 가지이다. 대표적으로 한양, 한성, 경성을 들 수 있는데, 당시 행정구역으로서의 공식명칭은 '한성(漢城)'이었다. 한 도시가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는 건 그만큼 오랜 역사와 다양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천을 일컫는 이름은 삼국시대 때 이름인 '미추홀'과 포구를 중심으로 퍼진 별칭인 '제물포' 정도가 널리 알려져 있다. 1899년 9월18일 인천과 노량진 간 경인철도가 부분적으로 개통된 이후 한강철교 공사가 순조롭게 이어져 1900년 7월8일 드디어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과 그 관문인 인천을 잇는 경인철도가 온전히 개통됐다. 당시의 정거장은 모두 열 개였다. 바로 경성, 남대문, 용산, 노량진, 오류동, 소사, 부평, 우각동, 축현, 인천이었다. 그런데 철도에서 사용하는 지명은 단순한 지역의 이름이 아니라 역명(驛名)임에도 불구하고 왜 철도회사는 '경성(京城)'과 '인천(仁川)'이라는 역명을 놔두고 '서울(Seoul)'과 '제물포(Chemulpo)'라는 이름을 썼을까?

▲ 'Chemulpo'와 'Saalijy'로 역명이 표시된 경인철도 영문 승차권.
▲ 'Chemulpo'와 'Saalijy'로 역명이 표시된 경인철도 영문 승차권.
▲ '仁川'과 '杻峴'으로 역명이 표시된 경인철도 한자 승차권.
▲ '仁川'과 '杻峴'으로 역명이 표시된 경인철도 한자 승차권.

그것은 아마도 초창기 철도의 주 이용객이 외국인이고, 경인철도합자회사 역시 일본 회사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의 경인철도 승차권을 보면 각 역의 영문 역명이 표기돼 있는데, 인천에 해당하는 로마자 표기가 바로 'Chemulpo(제물포)'였다. 축현은 'Saalijy(싸리재)', 우각동은 'Sopple(소뿔)', 부평은 'Poopyong', 소사는 'Sosha', 오류동은 'Oricle(오리골)', 노량진은 'Nodul(노들)'이었다. 더 나아가 용산은 'Yungsan', 남대문은 'South gate', 경성은 'Seoul'로 돼 있다. '경성'이라는 이름은 서양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발음하기 어렵고, 더구나 당시 우리나라의 일반 대중이 두루 사용하는 지명이 아니어서 '서울'이라는 별칭이 선호됐으리라 분석된다. 인천의 경우는 발음상의 문제보다는 당시 외국인들에게 개항장으로서의 제물포라는 지명이 워낙 강하게 인식돼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더구나 역의 입지가 도시의 중심이 아닌 항구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행정구역인 경기도 인천부라는 정식 지명이나 역명으로서의 '인천'은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제물포'로 불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경인철도합자회사가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인수합병되고 다시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바뀌게 된다. 일제는 '서울'이나 '제물포'라는 별칭 대신 원래의 역명인 '경성'과 '인천'을 살리면서 '게이조'와 '진센'으로 부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광복 이후에도 그 혼란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인철도 전선 개통 이후 짧게는 5년에서 길어야 10년 동안 '제물포'라고 불린 이 나라 철도의 시발지가 아예 공식 역명인 것처럼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 결과 철도청에서 펴낸 철도역사서를 비롯하여 각종 백과사전, 인터넷 자료 모두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인 경인선은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제물포 간 33.2㎞가 처음 개통….” 이런 식으로 적고 있는 것이다. 기회가 될 때마다 “제물포가 아니라 인천”이라고 바로잡았고 다행히 제물포 논란은 점점 잦아드는 추세다. 사실 우리나라에 '제물포'라는 역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9년의 일이며, 이 역은 한국철도의 효시와는 당연히 아무 관계가 없다.

▲ 축현(杻峴)역을 동인천(東仁川)역으로 개칭한다는 교통부 고시 제417호가 실린 1955년 6월29일자 대한민국 관보.
▲ 축현(杻峴)역을 동인천(東仁川)역으로 개칭한다는 교통부 고시 제417호가 실린 1955년 6월29일자 대한민국 관보.

#유현역? 축현역!

제물포에 대한 오해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만 반론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다. 그런데 최근에 불거진 축현역 관련 논란은 성격이 좀 다르다. 축현역이란 지금의 동인천역을 말하는데, 이 논란의 가장 큰 쟁점은, 한자로 쓰인 역명의 '杻峴'을 과연 유현으로 읽을 것인지 축현으로 읽을 것인지 하는 것이다. '동인천'이라는 역명을 사용한 지 65년이 넘었는데 도대체 옛날 역명이 유현이면 어떻고 축현이면 어떠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은 122년 전 기차가 이 땅에서 맨 처음 달릴 때 존재했던 경인철도의 일곱 개 정거장 중 하나로, 인천지역 근대화의 산증인이자 핵심공간이기에 그 이름을 허투루 부를 수는 없고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함이 있다.

일단 이 역명이 '싸리재'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당시의 영문명이 'Saaliji'로 되어 있고, 주변에 실제로 싸리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杻'이라는 한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감탕나무 뉴, 또는 유', '수갑 추'로 나와 있다. 감탕나무란 제주도와 울릉도, 남부지방 해안가에서 자라는 한국 원산의 상록활엽수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백나무와 비슷하게 생겼다. 수고(樹高)는 10m에 이르고 가을이면 빨간 열매도 달린다고 한다. 이렇게 감탕나무와 싸리나무는 전혀 다른 수종이다. 그래서 감탕나무 또는 수갑을 뜻하는 의미에서 '杻'자를 썼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누구든 싸리나무를 표기하기 위해 쓴 한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의 우리나라 국민 대중이 사전과 옥편을 대신하여 사용하고 있는 네이버의 한자사전에서 '杻'자를 검색해 보면, 일반 옥편에 나오는 풀이 외에 '싸리나무 축'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그러니까 중국이나 일본 등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만 싸리나무를 뜻하는 '축'으로도 읽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로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紙杻洞), 경상남도 사천시 축동면(杻東面),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大杻里) 등이 있다고 예시되어 있다.

2021년 현재 우리나라 역명 중에서 '杻'이라는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정거장은 서울교통공사의 3호선 지축역(紙杻驛)과 한국철도공사의 태백선 추전역(杻田驛)이 있다. 지축동은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던 지정동(紙亭洞)과 싸리나무골(축리·杻里)이 합쳐진 지명이다. 추전역의 경우 현재의 도로명주소가 '강원도 태백시 싸리밭길 47-63'이라는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추전'이라는 역명은 싸리나무에서 비롯됐다. 추전역과 똑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역이 북한의 평라선(평양과 나진을 잇는 철도)에도 있는데, 북한에서는 추전역이 아닌 '축전역'(杻田驛·함경남도 수동구 축전리 소재)으로 부르고 있다. 물론 주변에 싸리나무가 많이 자라서 붙은 역명이다.

그렇다면 '杻峴'을 '유현'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첫째, '杻'자는 본래 '뉴' 또는 '유'라고 읽는다는 사전적 해석, 둘째로는 <독립신문>이라는 부정하거나 무시하기 어려운 근거가 있다. 우리나라에 철도가 처음 달린다는 소식은 대한제국시대 당시에 존재했던 두 개의 일간지인 <독립신문>과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꽤 많이 실려 있다. 기사 또는 광고, 때로는 논설 형태다. 그런데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1899년 9월16일과 같은 해 9월18일자 기사에 경인철도의 역과 역간 거리, 운임, 기차시간 등을 소개하면서 '杻峴'을 분명히 '유현'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말이다.

어쩌면 독립신문이 경인철도회사의 보도자료를 기사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일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도 있다. 즉, '杻峴'이라는 이름이 역 인근의 '싸리재'에서 따온 것이고 현지의 인천 사람들이 '축현'이라고 읽는다는 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단순히 한자 지식에 근거하여 '유현'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원천적으로 철도회사에서 잘못된 자료를 제공한 것인지 혹은 신문사에서 잘못 표기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현지 사정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杻峴'을 '유현'이 아닌 '축현'이라고 보는 것이 더 확실한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축현역은 1899년 9월18일 영업을 개시한 이후 1926년 4월25일 상인천역(上仁川驛)으로 역명을 변경했다. 그렇다고 해서 인천역까지 하인천역(下仁川驛)으로 바꿨던 것은 아니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역명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런데 광복 이후인 1948년 6월1일 상인천역은 축현(杻峴)이라는 옛 역명을 되찾는다. 그러다가 1955년 7월1일 축현역은 지금의 이름인 동인천역(東仁川驛)으로 역명이 변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48년의 역명 변경에 대한 자료는 미군정기여서 그런지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1955년 축현역에서 동인천역으로 역명을 변경할 당시의 근거는 대한민국 관보에 잘 남아 있다. 이 관보에는 교통부 고시 제417호로 “경인선의 축현(杻峴)을 동인천(東仁川)으로 개칭한다”라고 한자가 병기되어 실려 있다.

만약 대한민국 관보의 기록을 가지고도 <독립신문>의 실수를 인정할 수 없다면, 광복 전후의 신문 보도를 검색해봐도 좋다. 한글 신문에서 이 역을 '축현'으로 불렀음을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인천에는 1946년에 설립된 축현초등학교가 있다. 이 유서 깊은 학교는 옛 축현역 인근에 있다가 최근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신도시인 연수구로 학교를 옮겼다.

120년 넘도록 정거장을 지켜본 지역 주민과 그 철도를 운행해온 운영기관과 심지어 대한민국 관보조차도 받아들이지 않고, '杻峴'은 '유현'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일부 연구자들을 보면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환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사진=배은선 기획전문위원·오류동역장

/정리=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