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대해서라면 더 이상 구구한 사설이 필요할까. 스스로를 '부유한 노동자'라 자처했던 불세출의 기업인이다. 전 생애에 걸쳐 큰 걸음걸음으로 온 산하에 발자취들을 남겨놓았다. 가히 '정주영 기념관'이라 할만한 유무형의 구조물들이 방방곡곡에 널려 있다. 불모의 바닷가에 뚝심 하나로 일으켜 낸 조선소와 자동차메이커는 이제 세계 시장을 쥐락펴락한다. 20세기 한국이라는 무대를 휘저으며 질풍처럼 달려가던 풍운아. 그야말로 덩치값을 제대로 한 '빅맨'이었음을 누가 아니라 하겠는가.

▶태어난 고장을 아호(雅號)로 쓰는 것을 소생지호(所生之號)라 한다. 거산(巨山) 김영삼이나 후광(後廣) 김대중 등이 대표적이다. 정주영 회장의 호는 아산(峨山)이었다. 그가 태어난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의 아산마을이다. 고향을 자신의 호로 삼는 것은 수구초심(首丘初心)의 발로다.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둔다는 얘기니 사뭇 애틋하다. 아산 정주영은 청소년기 한사코 그 고향을 떠나려 했다. 고된 농사일에도 끼니가 어려운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다. 세번째 가출에 이르기까지 부친에 덜미가 잡혀 끌려오고서도 열아홉살에 최후의 가출에 성공한다. 이번엔 부친이 찾아오기 힘들 것으로 생각되는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항 부두에서 고된 하역 일을 하던 중에도 한가지 교훈을 되새긴다. 합숙소에서 부두노동자들은 빈대를 피하려 온갖 꾀를 부린다. 그러자 빈대들은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 공중낙하 방식으로 공격해왔다. '아, 빈대조차도 포기를 모르고 전력을 투구하는구나'

▶말년의 정 회장이 서산에 걸린 붉은 해처럼 다시 세계의 이목을 끌어모은다. 이른바 '정주영 소떼 방북' 사건이다. 1996년 6월과 10월, 두차례에 걸쳐 소 1001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거쳐 북한땅으로 넘어갔다. 그는 열아홉에 몰래 고향을 떠나올 때 부친이 소를 팔아 둔 돈 70원을 들고 나왔다. 그래서 판문점에서 “그 한마리의 소가 1000여마리의 소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고 했다. 이 광경을 CNN이 전 세계에 생중계하고 문명비평가 기소르망은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 했다. 그런데 그 소들은 이미 그 5년 전부터 서산 간척지에서 키워 온 것이이라 한다.

▶강원도 통천의 그 아산이 세계 정상급 병원의 이름으로 인천에 온다. 청라의료복합타운 조성사업을 맡게 된 아산병원이다.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국내 최고, 세계 37위급으로 평가한 병원이다. 서울아산병원은 청라에 800병상의 종합병원을 설립하고 수조원 규모의 의료바이오 관련 투자를 할 것이라고 한다. 젊은 시절 인천항 부두에서 빈대와 싸우던 그 '아산'이 최첨단 의료기관으로 다시 인천으로 오는 감동 스토리다.

 

/정기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