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들의 패권 다툼에 신음하는 '약자들'
▲ 영화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 중 용병 알레한드로가 국경 다리에서 소노라 카르텔 조직원들과 교전하는 장면.
▲ 영화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 중 용병 알레한드로가 국경 다리에서 소노라 카르텔 조직원들과 교전하는 장면.

“시계 작동원리를 물어보지 말고, 일단 시계바늘이나 잘 보고 있어요.”

미 국무부의 마약 카르텔 대응팀으로 차출된 FBI 요원 케이트는 첫날부터 작전 총 책임자인 맷의 행동에 의아해한다. 루크 공군기지로 케이트를 호출한 맷은 작전 목표도, 행선지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채 케이트를 전용기에 탑승시킨다. 게다가 작전의 컨설턴트로 투입된 알레한드로의 합류는 케이트의 의문을 더욱 증폭시킨다. 케이트는 의문의 남자 알레한드로의 정체를 캐보려고 하지만, 시계바늘이나 보라는 그의 퉁명스러운 대답만 돌아온다.

영화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2015)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무법지대를 배경으로 CIA의 '멕시코 마약 카르텔 소탕작전'을 적나라하게 그린 드니 빌뇌브 감독의 범죄 스릴러 영화이다. 감독은 치밀한 연출력으로 총격과 폭력, 살인이 난무하는 멕시코 도시 후아레즈의 혼돈스러운 상황을 실감 나게 그려냄과 동시에, 베일을 씌운 비밀스러운 스토리 전개로 압박감을 극대화시키며 심장을 조이는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특히 에밀리 블런트, 베니시오 델 토로, 조슈 브롤린의 불꽃 튀기는 열연이 시종일관 시선을 압도한다.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을 통해 암암리에 드러낸 미국 패권주의

FBI 아동 납치 전담팀의 리더 케이트와 그의 동료들은 납치당한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해 애리조나 주 챈들러로 출동한다. 멕시코 마약조직 소노라 카르텔의 아지트로 추정되는 건물을 급습한 FBI 요원들은 수색 과정 중 신원미상의 시신 수십 구를 벽 속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창고에 설치된 사제 폭탄의 폭발로 경찰 두 명을 잃는다. 이 사건으로 미 국무부는 카르텔 대응팀을 꾸리고, 팀장 맷의 제안으로 케이트도 팀에 합류한다. 그런데 작전 첫날부터 맷은 케이트를 거의 배제한 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막무가내식 작전 지휘로 일관하여 케이트의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맷은 카르텔 간부 하나를 빼 오려고 최정예 특수부대 델타포스까지 동원하여 후아레즈를 관통하며 무법 질주한다. 더욱이 맷의 대원들은 멕시코와 미국을 잇는 국경 다리에서 소노라 카르텔 조직원들과 무법천지를 방불케 하는 교전을 벌인다. 그제야 케이트는 맷이 국방부 고문이 아니라 CIA 요원이고, 알레한드로는 콜롬비아 마약조직인 메데인 카르텔이 고용한 검사 출신의 용병임을 알게 된다. 영화는 CIA의 주도로 질서 지워지는 남미의 마약 카르텔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그 이면에 감춰진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암암리에 드러낸다. 사실 남미의 마약 카르텔의 급속한 성장의 배후에는 CIA가 있다. 냉전 시기 CIA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걸 막으려고 마약 거래를 지원함으로써 마약 카르텔 형성의 기반을 제공한다. 메데인 카르텔이 바로 CIA의 지원과 통제하에서 마약 시장을 장악한 최대의 마약조직이었다. 그러나 이후 급부상한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고 CIA의 통제도 먹히지 않자, 미국 정부는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그 임무를 비밀리에 CIA에게 맡긴다. CIA는 국내 작전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FBI 요원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용병 알레한드로를 고용해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와해시킴으로써 질서를 되돌리려고 한다. 그런데 사실 CIA 작전의 이면에는 베일로 가린 미국의 진짜 목표가 감춰져 있다. 급박하게 움직이는 시계바늘을 쫓다가 마침내 그 작동원리를 어렴풋이 알게 된 케이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이용대상일 뿐이었음을 알고 무력감에 휩싸인다. 그리곤 위협에 굴복한 채 작전을 완수하고 유유히 사라지는 알레한드로의 뒷모습만 허탈하게 응시한다. 불법으로 덧씌워진 작전의 베일은 감히 들추지 못한 채…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는 신흥세력과 지배세력 간에 발생하는 극심한 구조적 긴장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근본원인으로 아테네의 부상에 따른 스파르타에 스며든 두려움을 지적했다. 다시 말해 두 도시국가 간의 패권 다툼이 재앙적인 전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 현상은 오늘날에도 미·중 갈등으로 재연되고 있다. 그리고 약자는 그 사이에서 신음할 뿐. 예나 지금이나…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에세이스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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