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느끼는 대화에서 찾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가장 널리 사용되던 편지는 이제 고전적 방법이 되어 버려 ‘손편지’라는 단어로 새로운 가치를 가진다. 워드 프로세스를 사용해 타이핑을 하는데 익숙해져서, 정작 하얀 백지에 펜으로 직접 글을 쓰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게다가 인터넷으로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는 요즘은 편리함을 우선으로 우리 생활 속에 즉각적인 소통을 강요한다. 80년 대 초 미국으로 이민을 간 나는 한국의 친구들과 서로에 대한 안부와 생각들을 편지로 나누었다. 사실 편지를 쓰고, 보내고, 받기까지의 기다림의 시간은 나름 낭만이라 불리워도 족하다. 다양한 앱Application 을 통한 즉각적인 소통은 사실 편리하긴 해도 단편적 기능이 우선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기발한 이모티콘이 많다 해도 정작 세밀한 감성을 전달하고 마음을 표현하는데에 최선이랄 순 없다. 그래서 문명의 혜택은 심심하게 누리는 셈이지만 아쉬움은 가슴 한 켠에 조그맣게 머물고 있다.

대학 다닐 때, 친구가 건네준 카세트 테이프에 같은 학교 의과대학 학생이 불렀다는 노래를 듣고 그 노래에 반하여 한동안 우편엽서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뜬금 없었을까.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일주일에 하나씩 엽서를 받는 느낌은. 난 봄학기를 끝낼 즈음 이젠 그만 즐거운 추억을 마무리하겠다는 마지막 엽서를 보내고 혼자만의 편지쓰기를 접었다. 가끔 혼자 웃는다. 무슨 심사로 그랬을까, 어쩌면 젊은날의 객기였을 수도 있겠다. 지금은 그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생각을 나누는 매개체로서 말로 나누는 대화가 있다. 전화통화도 한 방법이지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하면 얼만큼은 상대방의 생각이나 인격을 가늠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의 주관대로 상대방을 성급히 판단하거나 제 주장을 고집하느라 남의 얘기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성급한 대화의 말미에 일어나는 감정의 균열에, 실제로는 뒤끝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냥 그 순간에 잠시 일어나는 행동이니까 너무 개의치 말라고 하면 괜찮은가. 천만에, 그 행동으로 인해 정작 상처를 받는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말로 혹은 행동으로 던져진 모멸감 혹은 좌절감은, 받은 사람에겐 이미 깊숙한 상처로 박혀 쉽게 잊혀지거나 치유되지 못하는 것임을 간과해선 안된다. 무슨 트라우마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함에 있어 경계하게 되는 습성을 키울 수도 있다. 자신감을 잃고 소심한 열등감이 자리잡게 되어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시야를 가지게 된다면 얼마나 큰 죄일까 말이다.

신약성서에 보면, 듣는데에는 재빨리하고 말하고 화를 내는데에는 천천히 라는 말씀이 있다. (Everyone should be quick to listen, slow to speak and slow to become angry) 나이가 들면서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귀한 교훈이다 싶다. 막내아들이 묻기를, 엄마 그렇게 하는 동안 터져나오는 부정적 자기 감정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데요? 그래, 물론 힘든 사안이긴 하다. 그래서 직접 대화보다 글을 써서 전달하는 방법이 다시 대두된다. 일단은 자기를 객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면서 한결 정제되어지는 걸 경험하게 되니까.

봄이다. 산수유꽃이 송도 공원을 아름드리 노란색으로 물들인 걸 바라보는 것이 기쁨이다. 계절에 맞춰 가뿐한 차림으로 공원을 걸으며 감성충만을 느끼고 싶다. 그러면 글도 편안하게 쓸 수 있을게다.

 

/Stacey Kim 시민기자 staceykim6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