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피땀흘려 세운 인천축항
열매만 따먹은 일본

개항당시 항만시설 전무한 자연어촌
1884년 잔교1기·석축부두 1기 신축
일제 총독부 시절 갑문식선거 공사 착수
1918년 축항 준공식 …한국인 내빈 없이 진행
삼정물산 도전이 수감자 노역 허가 받아
백범 김구선생, 인천감옥서 축항 노역 동원
당시 온갖 술수로 한국인 인부·죄수 동원
다치거나 목숨잃은 자 등 기록은 없어
갑문식 도크 수익 대부분 일본인 차지
▲ 선거(船渠) 내 갑도(閘道)를 지나는 선박이 중앙을 통행하도록 양쪽에서 밧줄로 조절한다. 오른쪽 건물은 갑문의 개폐를 관장하는 갑문관리소이다. /사진 출처=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 축항 계선벽(繫船壁) 기초 땅파기 공사 광경이다. 계선벽은 선박을 매어 두는 벽, 곧 선박이 접안하는 벽으로 해저 지반으로부터 9m를 더 굴착해 내려가는 공사로 이 사진 모습으로 현재 5.7m에서 7.2m 정도 파 내려간 상태다. 이때는 이미 조선인 죄수들을 공사 현장에 투입했던 까닭에 검은 제복을 입은 순사들이 감시하고 있다. 김구 선생은 이듬해인 1914년에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어 이 공사에 투입된 것으로 생각된다.1913년 10월 경 사진이다./사진 출처=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개항 당시 항만시설이 전무한 자연형태의 어촌에 불과해 1884년 소형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잔교 1기와 석축부두 1기가 축조되고, 1893년 항로 표식과 부두의 증축, 1911년 3월 총 공사비 80만원을 들여 목조잔교 3기(총 230m)와 석축부두 1기(108m), 관세청사 및 검역소 부속건물 990㎡, 창고 2동 등이 6년 만에 완공되었다. 이러한 응급적인 시설로는 물량 소화가 불가능해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하는 인공축항(도크)을 추진 1911년 6월 11일 착공, 1918년 10월 27일 준공하였다.

개항 이후 항구로서 아무런 시설이 없던 제물포가 어촌 포구에서 제1선거(第一船渠) 축조에 이르기까지의 변모를 간략히 기록한 『인천광역시사』의 내용이다. 인천항은 제1선거 축조 이후 총 세 번에 걸친 부대설비 확장 공사 끝에 광복을 맞았다.

인천 축항의 역사는 1906년 대한제국 정부가 8개년 계획을 세워 인천항 설비공사를 시행한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중인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의 총독부가 들어서면서 규모를 확대하여 4,500톤급 선박 3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갑문식선거 공사에 착수했던 것이다.

▲ 1920년대 자유공원에서 관동, 중앙동 일대의 일본인 주택가와 함께 완공된 축항을 조망해 찍은 사진이다. 사진 중앙 v자형 철교처럼 보이는 것이 축항 갑문 입구이다. 그 바로 옆의 섬이 후일 매립되어 사라진 오푼도(五分島)이고, 오른쪽 두 섬이 소뭘미도와 월미도이다./사진 출처=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 1920년대 자유공원에서 관동, 중앙동 일대의 일본인 주택가와 함께 완공된 축항을 조망해 찍은 사진이다. 사진 중앙 v자형 철교처럼 보이는 것이 축항 갑문 입구이다. 그 바로 옆의 섬이 후일 매립되어 사라진 오푼도(五分島)이고, 오른쪽 두 섬이 소뭘미도와 월미도이다./사진 출처=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1906년 애초 대한제국 정부가 인천항 설비확장 공사에 나선 것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안하무인이 된 일제의 강압도 강압이려니와,

이 무렵 폭증하는 수출입 물량으로 인해 국내 각 항구의 설비 확장 공사가 시급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물론 갑문식도크 축조에 관한 기술이나 역량은 가지지 못했다고 하나, 이 같은 우리 정부의 의도나 인식은 전혀 무시되어 묻혀 버리고, 누구도 인천항 축조와 설비 확장 모두가 하나에서 열까지 순전히 일제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만 생각한다. 나라를 빼앗기면 역사조차 잃어버리고 만다는 사실 그대로이다.

아무튼 이 개명(開明)한 공학(工學)의 산물, 근대적 갑문식도크가 축조되어 당시 우리 인천 사람, 나아가 우리 국민이 얼마나 부(富)를 얻어 생활향상을 누렸는지 모르나, 그 이득의 대부분은 일인들 차지였을 것이 뻔하다. 도크 운영의 시작이라고 할 준공식부터 한국 사람은 조연(助演)조차도 아니었으니….

축항 준공식은 1918년 10월 27일, 선거 내에 마련된 식장에서 불꽃놀이와 함께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러졌다는데, 한국인 내빈이나 관계 인사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당시 신문에 실린 식장(式場)의 요인이라고는 오직 저들 상전(上典)들 이름뿐이다. 당시 조선총독 장곡천(長谷川)을 위시해서 담당 국장, 기술자, 그리고 경기도와 인천의 기관장들, 상공회의소 회두, 거류민단장, 해운업자 등 모두 일인들뿐이다.

하기야 그들이 '신전(神前)에 옥곶(玉串)을 봉(捧)하고 식을 폐하였다.'고 하는 기사로 미루어 차라리 한국인들이 그 식장에 앉지 않았던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옥곶은 일인들이 신사(神社)에 바치는 상록활엽수 가지이다.

▲ 1911년 6월 11일, 일제는 인천 시내 곳곳에 축항 기공식 축하 축등(祝燈)과 깃발을 치장하여 대대적으로 잔치 분위기를 냈다. 일본인과 함께 한국인 모습도 보인다. /사진 출처=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 일제는 축항 준공을 기념해 몇 종류의 기념 그림엽서를 발매했는데, 그 중 하나로 오른쪽 상단에 희미하게 찍힌 스탬프 흔적이 보인다./사진 출처=인천 정명 600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1권)

이야기 순서가 바뀌었다. 1911년 축항 기공식 때, 사내(寺內) 조선총독이 '난리를 평정하여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의 '진호(鎭護)' 두 글자를 휘호한 초석(礎石)을 바다에 빠트리는 행사도 가졌다고 하는데, 그 빠트린 위치가 축항이 들어서면 도로가 될 지점이었다고 한다. 1974년 우리가 내항을 확장해 오늘날 규모로 축조하면서 혹시 그 돌을 발견해 어찌 했는지 궁금하다.

또 한 가지, 축항과 관련해 인천 사람으로서는 더욱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축항 노역 사실이다. 백범은 1911년 안명근 사건(安明根事件)으로 체포되어 징역 17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또 한 번 인천감옥으로 이감되는데, 그 원인(遠因)이 바로 인천도크 축조였던 것이다.

나는 잔기(殘期)의 2년을 채 못 남기고 서대문 옥을 떠나 인천으로 이감되었다. 원인은 내가 제2과장 왜놈과 싸움한 사실이 유(有)하였는데 그놈이 비교적 고역이 심한 인천축항 공사를 시키는 곳에로 보내는 것이다.

윤병석 직해(直解) 『백범일지』의 구절인데, 백범 선생은 자신의 인천감옥 이감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선생이 축항공사에 부역하게 된 계기는 이 공사를 청부맡은 삼정물산(三井物産)의 책임자 도전(稻田)이란 자가 죄수들 인력을 이용하기 위해 청원을 넣어 허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관련 내용은 매일신보 1912년 5월 19일자에 「축항 공사와 죄수」라는 제하의 기사에 나와 있다.

▲ 축항 공사를 청부맡은 삼정물산(三井物産)의 책임자 도전(稻田)이란 자가 경성감옥과 인천분감의 조선인 죄수들의 부역을 청원해서 허가를 얻어 5월 15일에 죄수 40여 명, 16일부터는 70여 명을 동원하고 있다는 1912년 5월19일자 매일신보 기사이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축항 공사를 청부맡은 삼정물산(三井物産)의 책임자 도전(稻田)이란 자가 경성감옥과 인천분감의 조선인 죄수들의 부역을 청원해서 허가를 얻어 5월 15일에 죄수 40여 명, 16일부터는 70여 명을 동원하고 있다는 1912년 5월19일자 매일신보 기사이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인천의 축항공사는 지금 역부 일천여 명으로 하여금 역사를 급히 하는바, 이미 백분의 칠십은 준공되었으나 이후부터 역부를 쓸 필요가 있는데, 차차 농사를 당하여 역부가 부족할 염려가 있음으로써 청부자(請負者) 도전(稻田) 씨가 경성감옥과 인천분감의 죄인으로 부역케 하기를 청원 중이이더니, 근일에 허가이 되어 지나간 십오 일에는 죄수 사십여 명이 부역을 하였고, 십육 일부터는 칠십여 명씩 부역할 터이라더라.

실제 김구 선생의 인천 이감은 1914년으로 이 기사 이후 2년이나 경과한 것으로 보아 1912년 이후 계속해서 조선인 죄수들을 축항공사에 동원했던 모양이다. 선생은 극심한 노역을 견디지 못해 공사장에서 스스로 추락해 죽음을 택하려다 다른 조선인 죄수에게 미칠 죽음 때문에 단념하고, 오히려 “역사(役事)에 잔꾀를 부리지 않고 사력을 다하여 일을” 함으로써 “수월(數月) 후에 소위 상표(賞票)를” 받았다는 기록을 일지에 남기고 있다. 상표는 조선인 노역자들을 유인하고 독려하기 위해 공사 현장에서 쓰던 얄팍한 '당근'이었다.

요사이는 농가의 제일 분주한 때인 고로, 인천축항공소(仁川築港工所)에서 인부가 점점 감소함으로 일전부터 그 일하는 분수를 인하여 일급(日給)은 물론이오, 그 외에 토끼표[兎標] 담배를 준다더라.

매일신보 그 해 6월 20일자「인부에게 현상(懸賞)」 제하의 기사이다. 이렇게 일제가 한국인에게 갖은 술수를 다 써서 완공한 것이 저들이 자랑하던 인천축항이다. 당시 동원된 조선인 인부, 죄수 등 중에 혹 다치고, 혹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을 터이지만, 그 같은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인천항은 첫 선거 공사와 세 번에 걸친 설비 확장 공사를 통해 분명 한국인의 피와 땀이 흘러들어 축조된 것인데 일제는 인천 사람, 한국인은 철저히 배제한 채 저들만의 축항으로 삼았던 것이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