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 참살·단발령에 '국수보복' 깃발을 들다



1895년 10월8일 일본공사 미우라 주도로
일본군·낭인 등 궁궐 난입해 만행 저지르자
11월4일 충남 유성서 문석봉 거의 불 댕겨

지평 포수 대장으로 동학 빙자 불량배 평정
절충장군 첩지받은 인물로 의협심 드높아
군수 맹영재 의병 제안 거절에 크게 꾸짖고
포군 설득해 이듬해 1월11일 원주서 거병

 

▲ 김백선 의병장 초상화(지평의병 지평리전투 기념관)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0권(1896. 2. 23.)

 

◆ 일제와 그들 앞잡이 내각의 만행

1895년 한가위가 지난 지 5일째 되던 8월20일(양력 10월8일) 새벽, 조선 왕비를 참살하기 위하여 이른바 '여우사냥'에 동원된 일본 수비대 병력은 3개 중대 500여명, 칼잡이 자객(낭인) 60여명, 일본 순사대 100여명, 조선 훈련대 병사가 500여명이었다.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그들 앞잡이 김홍집, 우범선, 유길준, 이두황, 이진호, 조희연 등을 내세우고 갑오왜란(1894)에 이어 또다시 궁궐에 난입하여 민비(閔妃·1897년 11월5일 명성황후 추증됨)를 참살하고, 그 시신을 석유를 끼얹은 장작불에 태운 후 뒷산에 묻어버린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으니 이른바 을미왜란(乙未倭亂:'을미사변'은 부적절한 용어)이었다.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외부에 공문을 보내 말하기를, '일전의 병변(兵變:을미왜란을 조선 병사들끼리의 싸움으로 조작한 용어)은 밖에 전해졌는데, 본월 초8일 새벽, 훈련대가 대궐 안으로 돌진해서 소원(訴冤:원통한 일을 관청에 호소하는 일)했는데, 편복(便服)을 한 일본인 약간 명이 섞여 들어가서 난폭한 일(일본 군경과 자객들을 동원하여 민비를 살해한 후 불에 태워 궁궐 뒤뜰에 묻었던 일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을 저지르는 것을 보았다고 하니, 본 공사는 비록 이 말이 잘못 전해진 것을 알고는 있으나 사건의 관련성이 긴박하고 중요한 것이니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옳지 못한 것으로 번거롭지만 귀 대신은 확실히 가부를 조사해서 회답해 주시오.'라고 했다.”

“김윤식이 회답 공문을 통해 말하기를, '우리 군대를 조사해 보니 당일 대궐에 나아가 소원할 때에 만약 시위대와 만나면 자세히 구별할 수 없어서 충돌할 우려가 있었던 까닭에 외국 복장으로 가장하여 서로 격투를 벌이는 일이 없도록 기했던 것이며, 그들은 일본인이 아니었음으로 회답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것은 훈련대가 일본인으로 가장한 것이라는 대답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일본인이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을 두둔한 것이었다.” (필자 역·황현, <매천야록> 제2권. 을미(1895) 참조)

 

국왕과 문무백관들은 일제와 그들 앞잡이들의 만행에 치를 떨었지만, 궁궐 안에도 일본 군경과 그들 앞잡이들이 득실거려 아무 말도 못하고, 오히려 일본공사와 그들 앞잡이 내각의 '폐서인(廢庶人)' 강요에 못 이겨 어처구니없게도 왕비를 '빈(嬪)'으로 강등하고 말았으며,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일제와 그들 앞잡이 내각의 외부대신 김윤식이 주고받은 외교문서에서 왕비가 시위대와 훈련대 병사들의 싸움으로 인하여 행방불명되었다고 날조한 것이었다.

 

 

◆ 국수보복(國讐報復) 전기의병 일어나다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과 그들 앞잡이들과 주고받은 뻔뻔스런 언동에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國讐報復]'는 상소와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방(榜)이 나붙기 시작하면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의병은 일제에 의해 왕비가 참살당하고 이어 단발령이 내리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은 문석봉(文錫鳳)이었다.

그는 경북 현풍 출신으로 1895년 2월 공주부 영장(營將)에 있으면서 갑오왜란을 일으킨 일제를 몰아낼 것을 계획하고 용병 400여명을 훈련시키다 피체되어 4개월의 옥고를 치른 바가 있었는데, 출옥 후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는 거사를 도모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고 경상도와 충청도를 다니면서 상주 좌영장 최은동(崔殷東), 우국지사 김문주(金文柱)·오형덕(吳亨德)·노응규(盧應奎) 등과 교유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11월4일(음력 9월18일), 충남 유성에서 거의하기에 이르렀으니, 왕비가 참살된 지 한 달만이었다.

그 후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 전후 의병을 일으켜서 당시 관찰부를 점령한 6개 의진을 날짜순으로 살펴보면, 1896년 1월15일(음력 12월1일) 홍주에서 김복한(金福漢)·이설(李楔)·안병찬(安炳瓚) 등이 거의하여 홍주부를 점령했고, 1월17일 안동과 예안 등지에서 거의한 권세연(權世淵)·김흥락(金興洛)·이만도(李晩燾)·이중언(李中彦) 등이 안동부를 점령했고, 1월20일 춘천에서 거의한 성익현(成益鉉)·이소응(李昭應)·이진응(李晉應) 등이 춘천부를 점령했고. 일찍이 경기도 여주에서 민용호(閔龍鎬)가 거의하여 1월30일 강릉부를 점령한 후 원산 공략에 나섰고, 경기도 지평에서 거의한 김백선(金伯善)·이춘영(李春永)이 안승우(安承禹)와 함께 원주·제천·단양을 접수하고 유인석(柳麟錫)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2월17일(음력 1월5일) 충주부를 점령했고, 경남 안의(현 함양군 속면)에서 거의한 노응규가 2월19일 진주관찰부가 있는 진주성을 점령하자 정한용(鄭漢鎔)이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상응했다.

 

▲ 국맥 지평의병발상지비(양평군 지평면 지평교차로)
▲ 국맥 지평의병발상지비(양평군 지평면 지평교차로)

 

◆ 지평의병 일어나다

경기도 북·동부지역인 지평(현 양평군 속면)에서 김백선(金伯善)·이춘영(李春永)이 의병을 일으켰다. 김백선은 원래 지평 포수의 우두머리였는데, 기개가 있고 용력이 비상하였으며, 의를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인물이었다.

1년 전 '갑오농민혁명'이 발생했을 때 그는 지평·홍천 등지에서 동학을 빙자한 불량배들의 약탈로 인해 민간의 폐해가 매우 큰 것을 보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당시 감역(監役) 맹영재(孟英在)와 함께 포수들을 모아 훈련하며, 난동하는 불량배들을 평정하여 지역민을 평안하게 한 공로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정3품 당상관)의 첩지를 받은 인물이었다. 이춘영과 안승우는 대대로 이름난 집안의 후손으로서 같이 지평 고을에 살았다. 두 사람 모두 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일찍부터 의리와 지조 있는 인물로 알려졌다.

김백선은 을미왜란 후 더욱 비분강개한 마음을 가지고 역적의 무리를 토벌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계획하던 중, 국왕이 일제앞잡이 내각의 유길준에게 삭발을 당했다는 소식과 함께 단발령이 시행되자 민심이 크게 술렁거렸다. 김백선은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할 것을 결심하고, 지평군수 맹영재를 찾아가서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자고 권하였는데, 맹 군수가 이해관계를 말하며 응낙하지 않으니, 김백선이 크게 노하여 눈을 부릅뜨고 꾸짖었다.

“이런 대변(大變)의 때를 당하여 이 나라의 신민이 된 자라면 대소귀천을 막론하고 목숨을 바쳐 적과 싸워서 살면 의로운 사람이 되고, 죽으면 의로운 귀신이 될 것이다. 더구나 관청에 앉아 인부(印符)를 차고 있는 신하로서 위로는 군부(君父)가 욕보는 일을 급하게 여기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죽게 된 것을 동정하지 않는다면 주군(州郡)에 수령은 왜 있는 것이냐?”

하며, 가지고 갔던 엽총을 부숴 관청 뜰에 내던지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분노를 이기지 못하던 차에 이춘영이 찾아가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권고를 하니, 크게 기뻐하며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런데, 이때 지평에는 군수 맹영재의 휘하에 있는 포군(砲軍) 400여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김백선과 맹 군수가 양성했던 포수들이었다. 김백선은 그들에게 설유하여 말하기를,

“나나 공들이 모두 시골 백성으로 비록 나라의 녹을 먹지는 못하였지만, 우리가 입은 옷이나 우리가 먹는 밥, 그 어느 것이 임금께서 주신 물건이 아니랴. 이런 망극한 변을 당하여 어찌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아서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니, 포수들이 모두 공감을 표시하고 의병에 참여할 것를 맹서하니, 이날이 1월11일(음력 11월27일)이었다.

김백선과 이춘영은 맹영재의 눈을 피해 포수들로 하여금 이웃 고을인 강원도 원주의 안창역으로 모이게 한 다음, 이튿날 안승우와 합세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지평의병은 원주로 가서 읍을 점령한 다음, 원주 사람 김사정(金思鼎)을 총독, 박운서(朴雲瑞)를 도령장에 임명하고, 원주에서 의병들을 더 모아서 따라오게 한 다음, 1월17일(음력 12월3일)에 충청도 제천으로 들어가서 유진(留陣)하였다.

 

▲ 을미의병기념비(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57∙지평리 385-3)
▲ 을미의병기념비(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57∙지평리 385-3)

 

◆ 지평에 이어 경기 각지에서도 의병 일어나다

한편, 1월 말에는 청평천(淸平川)을 중심으로 경기도 가평 일대에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특히 강원도 춘천관찰사 조인승(曺寅承)이 부임해 오던 중, 가평의병과 가평지역에 파견된 춘천의병에 의하여 처단된 시기였던 만큼, 이곳에서는 가평·춘천 지역 의병들이 연합하여 관청을 점령하고 부왜인(附倭人)들을 척결하는 의병투쟁을 벌였는데, 가평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이 1만여명이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엄청났다.

그리하여 일제 앞잡이 내각에서는 1월31일(음력 12월17일), 관군 1개 중대 병력을 가평·춘천 방면으로 파견하여 2월5일에는 의병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죽창과 화승총 등으로 무장한 의병은 많은 피해를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수보복(國讐報復)'의 정신으로 뭉친 의병들은 이에 굽히지 않고 다시 전투태세를 정비하며 증파된 관군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기습작전을 전개하여 관군이 크게 고전하게 되었고, 양주·연천·철원 등지의 의병은 관아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일본공사는 이러한 사실을 외무대신에게 급히 전보로 전한 것이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나타나 있다.

“각 지방에 폭도가 봉기하여 관찰사를 살해하고(충주관찰사 피살) 군수를 축출하는 등(철원·양주·연천군수 모두 쫓겨남) 낭자(浪藉)하지 않은 곳이 없음. 그리고 정령(政令)이 추호도 경성 밖에는 시행되지 않음. 폭도(의병-필자 주) 진압의 수단이 없으며, 거의 무정부와 같은 모습임.”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0권. 1896. 2. 23.)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