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슬픔에 빠져 있을 피해자 가족들을 만날 생각에 걱정이 앞섰지만 어머니와 오빠는 감정을 자제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차근차근 이어가는 가족들 말에서는 슬픔이 아닌 이 사회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느껴졌다.

지난해 12월23일 새벽, 당시 중학생 2학년이던 딸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돌아왔다. 단순 폭행이 아니란 직감이 들었다. 딸과 함께 산부인과를 찾은 어머니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딸 몸에서 성폭행 당한 흔적이 발견됐다.

강제로 술을 먹고 취해 두 남학생에게 마치 짐짝처럼 끌려가던 CCTV 속 딸의 모습은 가족들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돌이키기 힘든 일이었다. 이제 가족이 해야 할 일은 딸의 상처를 치유하고 2차 피해를 막는 일이었다. 동시에 가해자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가족들 마음과 달리 경찰 수사는 무디고 더뎠다. 사건 발생 3개월이 지났지만 피의자 DNA 검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신변보호를 받지 못한 딸은 길을 가다 가해자들을 만나 도망쳐야 했다. 가족들의 절망과 분노는 믿었던 공공 시스템에 대한 배신에서 비롯됐다.
결국 가족들이 청한 도움의 손길은 '국민들'을 향했다.

지난 3월29일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가족들은 어렵게 이 사건의 전말을 털어놨다.
이 글은 청원 이틀 만에 20만명 이상 동의를 얻으며 세상에 알려졌다. 경찰은 뒤늦게 수사 고삐를 당겨 피의자 2명을 구속시키고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수사를 할 수 없던 게 아니라 하지 않던 것이다.

제 역할을 못한 건 교육청도 매한가지다. 강제전학 조치 된 두 학생 중 한 명은 주소지를 옮겨 또 다른 학교로 일반전학을 갔다.

하지만 학교는 해당 학생의 사연을 모르고 있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을 보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 학생들을 교육적으로 교화시키겠다는 교육청 말이 학부모들을 달래기 위한 '립서비스'에 불과한 허무맹랑한 말이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난 꼴이다.

세상에 사고는 없다. 사건만 있을 뿐이다. 사고로 통칭되는 사건들 이면에는 균열된 공공시스템의 흔적이 있다. 지난 13일 인천 남동구 한 임대아파트에서 살던 50대 정신장애인과 그를 돌보러 왔던 여동생이 화재로 숨졌다. 약 한달 전쯤 함께 살던 노모를 여의고 혼자 살아가던 그는 장애인 활동 지원 서비스도 받지 못했고 화재예방 설비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복지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세월호 참사 6주기를 맞은 오늘, 우리는 정부와 이 사회의 공공시스템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질문을 던져본다.

이창욱 사회부 기자